영원한 제국을 꿈꿨던 클레오파트라의 도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지중해의 푸른 빛이 넘실거리는 알렉산드리아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애잔한 사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역사의 도시이다. 고대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알렉산드리아 등대(파로스 등대)와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베드로의 제자인 마가의 종교적 삶과 아리우스, 아타나시우스 등 초기 기독교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자,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왕국이 멸망한 후 유대교의 중심지로도 많은 역할을 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다음으로 큰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는 룩소, 아스완, 사카라, 멤피스 등 고왕국과 중왕국 시대에 없었던 도시이다. 문헌적으로 언제 도시가 형성됐는지 알 수 없지만, 기원전 331년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의 이름을 붙인 도시를 세울 것을 계획하고, 그리스 출신의 건축가 디노크레테스에게 명령을 내려 라코티스에 건설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23년 6월 13일, 이 도시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바빌론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그의 부하 장군이자 계승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의 총독이 되었고, 기원전 305년 마침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창건하고 이집트의 새로운 파라오 시대를 열었다.
아스라한 파라오의 옛 영광이 스민 알렉산드리아는 2개의 주요 고속도로와 철도가 수도 카이로로 연결되고, 겨울이면 온화한 날씨와 140km에 이르는 지중해 해변이 있어 중동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피서지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집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의 명성과 역사문화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이집트의 고대도시들보다 파라오의 문화유산이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로마 제국의 식민도시처럼 로마풍의 건축물과 로마 황제들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다. 그중에서도 로마 시대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그레코로만 박물관, 2세기경 로마 시대 때 지어진 로마 원형 극장,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얼굴상을 얹기 위해 만들어진 폼페이의 기둥,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파로스 등대가 있었던 카이트베이 요새 등이 알렉산드리아의 주요 볼거리이다.
물론 카이로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같은 거대한 건축물은 없지만, 2세기경 로마 시대 때 건축된 원형 극장은 있다. 유럽에서 값비싼 대리석과 아스완에서 가져온 화강암, 그리고 소아시아에서 수입한 녹색 대리석 등으로 치장한 원형 극장. 이곳은 800여 명이 앉을 수 있고, 좌석마다 로마 양식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원형 극장 주변에는 이집트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로마 시대의 공동목욕탕이 있다. 또한, 1892년 설립된 그레코로만 박물관은 약 4000여 점의 고대유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람세스 2세의 흉상과 클레오파트라의 두상 등 이집트 유물과 세라피스 신의 흉상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입상, 그리고 대리석으로 만든 모자이크 등 다양한 로마 시대의 유물도 눈에 띈다.
카이로와 비교해 아주 유명한 유적지와 유물은 없지만, 그래도 클레오파트라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이기에 그녀와 관련된 역사적 문화적 공감을 위해서 알렉산드리아를 찾는다. 그녀가 열심히 공부했던 옛 도서관 대신 2002년 새롭게 단장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들어섰지만,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는 20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책이나 영화 등을 통해 끊임없이 인류사에 등장하고 있다.
거대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아름다운 지중해변을 거닐며 파라오로서의 꿈을 키웠던 클레오파트라. 그녀의 이름은 이집트, 로마 제국, 카이사르 등 조금만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들어본 이름이다. 파스칼의 고전 작품 <팡세_Pensées>에서는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글귀도 있다. 중국의 양귀비, 프랑스의 조제핀과 더불어 세계 3대 미인으로 손꼽히는 클레오파트라는 고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정식명칭은 클레오파트라 7세이다.
기원전 69년 지중해를 끼고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클레오파트라는 18세 때 일곱 살 어린 이복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한 뒤 공동의 파라오가 되었다. 하지만 이복동생들과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 얽혀 잠시 파라오에서 물러나 야인 생활을 했다. 그 당시 로마 제국의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제국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을 때, 알렉산드리아를 찾아온 카이사르의 후원으로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죽이고, 또 다른 이복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하여 이집트를 공동통치하였다.
21세의 뇌쇄적인 미모의 클레오파트라는 52세의 카이사르를 자신의 강력한 후원자로 삼기 위해 나일강으로 함께 여행을 떠났고, 얼마 후 '작은 카이사르'라는 뜻의 아들 카이사이론(프톨레마이오스 15세)을 낳았다. 로마 제국에서 가장 권력이 강했던 카이사르로부터 후원을 받으면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받았다.
기원전 44년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를 따라 제국의 심장인 로마로 함께 들어갔지만, 카이사르가 정적에 의해 암살당하자, 아들 카이사이론을 데리고 도망치듯이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단순히 카이사르의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카이사르를 통해 이집트와 로마 제국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그녀의 꿈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절망과 슬픔에 빠져 있을 시간도 없이 클레오파트라는 또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해야만 했다. 세 살 된 아들과 공동 파라오로서 이집트의 안전과 번영을 생각해야 했다. 이때 로마 제국은 카이사르가 죽은 후 그와 수많은 전쟁터에서 동고동락을 함께한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양아들이자 훗날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양강 세력을 형성하며 새로운 패권의 주인이 되고자 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과연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 끝에 미래 권력자보다는 현재 권력자인 안토니우스를 지지했고, 그를 알렉산드리아로 초대해 유혹했다.
같은 하늘 아래 2명의 권력자는 없는 법. 기원전 31년 9월 2일,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일인자 자리를 두고 그리스 이오니아해인 악티움에서 마지막 전쟁을 치렀지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은 패배하였다. 악티움에서 후퇴하여 이집트까지 쫓겨 온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품에 안겨 자살로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로써 클레오파트라의 두 번째 꿈도 좌절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에게 했던 것처럼 옥타비아누스에게 유혹을 손길을 보냈지만, 끝내 거절당하자 기원전 30년 8월 12일, 마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집트 역사에서 ‘불멸의 파라오’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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