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향기 가득 피어나는 봄꽃의 향연
순천 선암사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땅을 비집고 솟아나는 어린 싹의 생명력에 사람들은 찬사를 보낸다. 엄동설한 품었던 꽃향기를 딱딱한 나무껍질을 헤치고 밀어내는 매화를 보며 사람들은 많은 사랑을 건넨다. 옛 성인들은 추위를 이기고 눈 속에서 그윽한 꽃향기를 피우는 고귀한 품위에 이끌려 매화를 항상 가까이했다. 사군자 가운데서도 제일로 손꼽히는 매화는 늦겨울과 이른 봄에 꽃을 피워 강인한 절개와 지조를 보여준다. 난초, 대나무, 국화 등과 함께 선비 정신을 대표하는 매화.
조선 초기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유학자, 강희안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함부로 번성하지 않는 희소성, 세월의 풍상을 이겨 낸 늙은 매화나무의 모습, 살찌지 않고 탐욕 없는 마른 모습, 그리고 꽃봉오리가 벌어지지 않고 오므라져 있는 우아한 자태’ 등으로 매화를 높이 평가했다. 선비 정신의 상징으로 평가받은 매화는 시와 그림의 소재로서도 아주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난초는 빼어난 곡선미를, 대나무는 의로운 기개가 하늘로 뻗치는 듯한 직선미를, 그리고 매화는 단아한 굴곡미를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매화를 수묵화로 처음 그린 사람은 북송의 선승인 ‘중인仲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부터 그리기 시작했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 표현 기법을 달리하면서 매화의 이미지를 고결함으로 승화시켰다. 이처럼 그림의 소재와 주제로 사랑받은 매화는 봄의 기운을 알리는 대표적인 전령사로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매화는 단순히 꽃의 매력 때문에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매화의 꽃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꽃이 지면서 맺기 시작하는 열매는 약재와 술로써도 사용되고 꽃잎은 죽을 만드는데도 쓰인다. 뭐니 뭐니 해도 매화의 백미는 봄에 꽃을 따다 말렸다가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는 추운 겨울날 매화차 위에 띄우는 것이 아닐까. 아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 매화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3월 초순이면 봄기운이 스며든 남녘으로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매화꽃 여행을 떠난다. 은은한 매화향기가 봄바람을 타고 우리의 눈과 마음속으로 다가서면 사람들의 발길은 어느새 매화꽃을 찾아간다.
이 중에서도 토종 매화로 가장 유명한 순천 선암사仙巖寺는 조계산 자락에 있어 다른 곳에서 매화가 다 지고 난 4월 초에 매화의 진풍경이 펼쳐진다. 고결과 맑은 마음이란 꽃말을 가진 매화꽃이 흐드러진 선암사의 무우전 담장은 선계仙界를 연상시킬 만큼 그윽한 꽃향기로 가득 찬다. 처마에 매달린 풍경조차 따뜻한 봄빛에 낮잠을 청할 때면 곁에 있는 800년 된 노매老梅는 가느다란 꽃술을 드러내며 산사의 봄을 알린다.
늙은 매화나무에서 회춘을 알리는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발길이 부산해진다. 선암사 매화꽃이 가장 황홀한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한다. 태양의 방향이 남쪽으로 돌기 시작하면 꽃의 생김새와 향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직사광선보다 역광으로 볼 때 매화의 참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부드러운 바람에 다섯 개의 붉은 꽃잎이 가늘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와, 좋다!” 하고 감탄사가 절로 난다.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밤새 품었을 꽃향기가 온몸으로 퍼져 영혼을 흔들어 놓는다. 탁했던 영혼이 일순간 정화가 된다. 그냥 꽃만 바라보는 것으로, 기념사진 몇 장 찍는 것으로 매화를 충분히 느낄 수 없다. 어려운 걸음인 만큼 매화의 참모습을 보려면 꽃그늘에 앉아 매화와 함께 봄 햇살을 즐기거나, 눈을 감고 마음속에 숨겨 둔 또 다른 자신을 찾는 명상에 잠겨 보라. 선승이 따로 없다.
늙은 매화나무만큼이나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지는 담벼락을 따라 홍매紅梅와 백매白梅가 꽃을 피우는 선암사. 벚나무처럼 꽃 터널을 이루지는 않았지만 차밭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서면 누런 황톳길 위로 매화 향기가 태양의 그림자처럼 머문다. 이처럼 매화 향기로 가득 찬 선암사에는 하얀 속내를 드러낸 목련, 붉은빛을 쏟아내는 동백, 병아리처럼 노란 개나리 등 봄소식을 알리는 꽃들이 건물 사이사이에서 피어나 봄의 교향시를 읊조린다. 특히 대웅전 뒤에 있는 늙은 홍매는 선암사의 멋을 한껏 드높인다. ‘울긋불긋 꽃 대궐’이라는 노랫말처럼 선암사의 봄은 작은 바람에도 꽃잎이 흩날리는, 봄꽃들의 향연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화사花寺’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 화사에서 으뜸은 단연 매화다. 다른 사찰에 비교해 선암사 매화는 오래된 노매인데다 그 수도 많아 그윽한 향과 단아한 봄을 온전히 베풀고 있다. 벚꽃처럼 화려하지도 라일락처럼 향기가 강하지도 않지만 단아한 기상과 우아한 자태가 돋보이는 매화는 한마디로 봄꽃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암사의 봄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이 부시게 푸른 날 선암사에 와서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 속에 몸을 담그는 일은 평생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이 된다. 특히 바람결에 흔들리던 매화 꽃잎이 푸른 하늘 위로 힘차게 날갯짓하듯 흩날리다가 마침내 뿌리를 향해 떨어지는 모습은 이곳이 마치 무릉도원처럼 느끼기에 충분하다. 봄비가 아닌 꽃비를 맞는 기분은 아마 선암사가 아니면 쉽게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선비의 올곧은 정신과 기품을 상징하는 매화는 도시에서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꽃비는 분명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고, 온몸에 퍼져있는 모세혈관을 자극해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제공한다.
'병원매거진 > 이태훈세계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한 제국을 꿈꿨던 클레오파트라의 도시 (0) | 2020.05.28 |
---|---|
정숙하고 검소한 불교의 향기를 간직한 도시 (0) | 2020.04.28 |
500리 물길 따라 떠나는 향긋한 봄꽃 여행 (0) | 2020.03.31 |
유럽의 향기가 묻어나는 아시아의 황금 도시 (0) | 2020.02.10 |
‘태양의 땅’ 호라즘의 심장부 (0) | 2019.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