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차를 사랑한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의 고향
네덜란드 레이던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화가 중 한 명인 렘브란트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화가다. 밝고 어두운 명암 속에 비춰진 한 예술가의 자화상은 우리에게 강인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 중에서 1628년에 그린 스물두 살의 렘브란트 자화상은 그의 명성에 걸맞은 작품이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광선 때문에 얼굴은 어둡고 희미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은 청년 렘브란트를 찾기 위해 숨을 죽이고 천천히 그의 얼굴을 응시한다. 무언가를 옆으로 흘겨보는 듯한 그의 눈매와 두루뭉술한 코, 그리고 두툼한 입술 등의 실루엣에서 엿볼 수 있는 은은한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매료된다. 꽤 긴 시간 동안 청년 렘브란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그가 태어나 젊은 시절을 보낸 그의 고향 레이던이 생각난다.
렘브란트가 태어나고 성장한 레이던은 우리에게 조금 생소한 이름이긴 하지만, 17세기에 레이던은 네덜란드에서 암스테르담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렘브란트가 태어나기 전만 해도 도시 인구가 5만여 명에 달할 만큼 레이던은 유럽에서 꽤 알려진 도시였다. 청년 렘브란트가 다녔던 레이던 대학(1575년 건립)은 유럽에서도 유서 깊은 곳이자 네덜란드 최초의 대학으로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지금은 그때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지만, 당시의 책을 보면 레이던 대학의 명성이 대단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 건물마다 렘브란트 작품으로 장식한 레이던의 거리 풍경
중세시대 때부터 운하가 발달한 레이던은 암스테르담과 함께 상공업 도시로 번성하며 네덜란드의 문화와 예술을 대표하는 학문 도시로 발전했다. 로마 시대 때는 라틴어로 ‘로마인의 야영지’라는 뜻의 ‘루그두눔 바타보룸’으로 불리었으며, 9세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도시가 발달했다. 무엇보다 크고 작은 운하들이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있고, 강을 따라 르네상스식 건축물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서 암스테르담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중세시대 때는 모직 공업이 발달했으며, 그 후로는 네덜란드의 인쇄와 출판 중심지로 주목받는 도시였다. 지금은 운하도시 또는 렘브란트의 고향 정도로만 기억되지만, 이곳은 한 천재에게 예술적 영혼을 일깨워준 소중한 곳이다.
◇풍차와 운하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레이던
레이던 중앙역을 빠져나오자마자 그의 작품 속에서 가끔 등장했던 운하와 다리, 그리고 풍차가 낯선 여행자들을 반겨준다. 또한 작은 도시를 천천히 걷다 보면 거리, 운하, 다리, 학교, 도서관 등에서 젊은 렘브란트를 만날 수 있다. 과연 무엇이 그를 세계적인 화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을까? 이에 대한 궁금증은 도시를 둘러보다 보면 하나둘씩 그 의문이 풀린다.
흰색으로 칠한 레이던 중앙역을 벗어나 구시가지로 5분 정도 걸으면 렘브란트의 작품에 등장한 풍차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언제부터 풍차가 이 마을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말끔한 풍차가 렘브란트 집안의 내력을 암시한다. 미술평론가들은 이 풍차가 바로 렘브란트 특유의 빛을 이용한 그림의 원천이라고 평가한다. 풍차가 바람에 의해 천천히 돌아갈 때 풍차의 날개에 의해 빛이 가려지면 어두운 그림자가 생기고, 날개가 지나가면 밝은 태양 빛이 쏟아지는 현상을 어릴 적부터 눈으로 체험한 것이 빛을 이용한 그의 화풍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자신의 집에서 운영하던 풍차가 그를 세계적인 화가로 만드는 데 일조한 셈이다. 렘브란트에게 풍차는 그의 그림 인생의 밑거름이 될 만큼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또 풍차로 인해 유소년 시절에는 라틴어와 회화를 배울 기회도 얻었다. 이제는 더는 돌아가지 않지만, 그의 그림 속에 풍차는 오늘도 변함없이 돌아간다.
◇ 생가로 들어가는 입구에도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장식됐다
잠시 운하 위에 놓인 다리에 서서 풍차와 주변 풍경을 감상하노라면 너나없이 화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길이도 얼마 되지 않는 작은 다리를 건너 스틴 거리로 들어서자 갑자기 집채만 한 그림들이 눈 속을 파고든다. 구시가지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그의 영혼이 담긴 명작들이 야외 전시실처럼 건물마다 걸려 있다. 여행자들은 렘브란트와 관련한 미술관이 없다는 안내 책자를 보고 다소 실망하지만, 거리를 누비는 동안 야외에 걸린 그림들을 보면서 기존의 미술관에서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다른 감동을 느끼게 된다. 거리와 건물 외벽, 신호등, 골목길 등에 붙여진 그의 그림은 도시 어딜 가든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도시에 걸린 대부분 작품은 그가 암스테르담으로 떠나기 전 레이던에서 머물 때 그려진 것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그를 이웃집 아저씨처럼 편안하게 생각하고, 그에 대한 자긍심 또한 굉장하다. 곳곳에 전시된 그림은 달리는 자동차와 운하를 가로지르는 배에서도 볼 수 있고, 아름다운 노천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도로 간판이나 안내표지에서도 그의 자화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구시가지 중심지인 보테르마르크트Botermarkt 거리에 서면 저 멀리서 <작업실의 화가Artist in His Studio>라는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 외벽을 완전히 덮을 만큼 아주 큰 이 그림을 바라보노라면 금방이라도 렘브란트가 그림 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다. 그림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이젤과 캔버스와 자연 채광을 흠뻑 받는 방 안, 그리고 한 귀퉁이에서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다른 어떤 그림에서도 볼 수 없는 색다른 느낌이다. 골목길에는 큰 팔레트가 건물 벽면에 걸려 있고, 그가 그린 자화상과 다양한 작품들이 건물과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 같다.
◇ 보테르마르크트 거리에서 바라다 본 렘브란트의 작품들
마치 야외 미술관 같은 레이던의 거리를 서성이다 보면 렘브란트의 애달픈 삶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1606년 7월 15일에 태어난 그는 방앗간 사업을 하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라틴어와 그림을 배울 수 있었다. 소년 렘브란트는 어린 시절 제도권 아래의 교육보다는 예술에 더 큰 관심과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들어갔던 레이던 대학을 결국 자퇴하고, 아버지의 후원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어느새 훌쩍 자란 청년 렘브란트는 1624년부터 자신만의 아틀리에를 열고 1632년까지 독학으로 친척이나 이웃 노인, 성서 등에서 소재를 얻어 꾸준히 그림을 그린다. 어느새 20대 중반을 넘긴 그는 네덜란드에서 서서히 유명해지자 본격적으로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해 고향을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다.
20대 후반에 들어선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서 촉망받는 젊은 화가로서 부와 명예를 누리게 된다. 한마디로 렘브란트의 삶에서 레이던은 거친 예술적 영혼이 꿈틀대던 곳이라면, 암스테르담은 그의 전성기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곳이다.
◇ 건물 외벽을 장식한 <작업실의 화가_1629년>
보테르마르크트 거리에서 건축물에 걸린 그의 작품을 감상하노라면 우리 머리에는 레이던의 전원적인 풍경이 떠오르기도 하고, 세련되고 격정 높은 색채와 때로는 귀족적인 화풍이 사람들의 마음에 삶의 희망을 뿌려주는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예술의 힘이 아닐까.
◇ 렘브란트가 고향 레이던을 생각하며 그린 드로잉 작품
'병원매거진 > 이태훈세계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례자들이 잠시 머물러 가는 도시 (0) | 2019.08.30 |
---|---|
영국 속의 또 다른 영국, 아름다운 상상의 나라 (0) | 2019.07.29 |
고대 이슬람 문화의 정수를 고이 간직한 도시 (0) | 2019.05.28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의 도시 (0) | 2019.04.30 |
잉카 문명의 영화로움을 간직한 도시 (0) | 2019.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