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한라병원

이명아명,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자신의 몸처럼 돌본다

연재종료코너/안대찬세상만사

잘난 자식, 못난 자식

제주한라병원 2011. 6. 1. 14:47

2008년/6월

요즘 서울 광화문과 시청 주변 도로들은 아주 오랜만에 수많은 사람의 기운을 느끼느라 놀라고들 있을 것이다. 6․10 항쟁이 있던 87년 이후로 오랜 시간 자동차 타이어 열기에만 익숙해져 왔으니 말이다. 21년 만에 엄청난 규모의 국민적 항의가 펼쳐지는 계절에 필자 혼자 한가하게 중국 여인들 이야기나 하고 있기 민망해서 이달엔 잠시 쉬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작년 하반기부터 정조(正祖)를 소재로 한 다양한 사극이 안방을 차지해왔다. 그 중 백미는 ‘M본부’에서 방송된 ‘이산’이라는데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탕평책으로 유명한 영조(英祖)와 세손(世孫) 이산(훗날의 정조)의 리더십이 감칠맛나게 펼쳐졌는데 아쉽게도 이달에 종영이란다. 인상적이었던 대목 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영조는 이산을 왕의 재목으로 키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여러가지 단련을 시키고, 자신의 건강이 안 좋아진 때를 빌어 그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 이때 의욕 넘치던 이산은 서민과 난전상인들을 괴롭히는 시전상인들을 압박할 급진적 개혁조치로 소위 금난전권(禁難廛權, 난전 상인을 금지하거나 단속할 수 있는 권리)을 폐지한다. 하지만 곧 시전상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결국 본의와 달리 서민들의 일상생활조차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때 영조가 세손을 꾸짖는 대목이다.

 

“아마 네가 11살 때였을 게다. 난 그때 너한테 임금이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오늘 그 답을 일러주마. 그것은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하늘의 달은 연못을 가려 비추지 않는다. 임금도 그래야 한다. 잘난 자나 못난 자나, 힘 있는 자나 연약한 자나 임금이라면 제 백성을 자식처럼 품고 거둬야 하는 것이야.

 

시전상인들... 그놈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다. 조정중신들에게 뇌물을 바쳐 뒷배를 봐 달라 하고 나라의 온갖 이권을 챙겨가는 놈들이야. 또 지들끼리 작당하여 가난한 백성들의 등을 친 악귀같은 놈들이지. 허나 그 시전상인들도 네 자식이야. 능력은 있으되 심보가 고약한 네 자식들 중 하나야. 허면 넌 어찌 했어야 했느냐? 자식의 못된 짓은 매를 들어 다스리되 그 능력을 살릴 방도를 찾았어야 했다.”  (드라마 ‘이산’에서)

 

영조는 이산에게 군주(君主)의 판단이 ‘잘난 자식 대(對) 못난 자식’의 이분법적 공간에 갇혀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못난 자식을 괴롭히는 잘난 자식이 있다면 내치기 전에 매로든 교육으로든 선도하고 설득하여 잘난 자식이 가진 역량을 사회에 가치있게 쓰도록 이끌어야 함을 주문하고 있다. 물론 시전상인들이 요즘으로 치자면 기업쯤 될 것이고, 난전상인이나 백성들이 서민쯤 될 것이라서 당시는 현재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진 것 같지만, 거꾸로 살펴보는 지혜를 우리에게 준다.

 

만약 영조가 지금의 이 대통령에게 나랏님 선배로서 조언을 한다면 뭐라고 할까 상상해봤다. “이보게, 이 대통령. 임금이 해야될 첫 번째 일은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라네. 하늘의 달이 연못을 가려 비추지 않듯 수출 잘해서 돈 잘 버는 기업이든 광화문 거리에 나선 별볼일 없는 서민들이든 모두 제 자식처럼 품고 거둬야 하는 것이지. 효율성이나 경제력, 경상수지 기여도 등 모든 면에서 기업들에 비할 바가 안되는 자들이 서민들이고, 그들이 할 수 있다는게 고작 길거리에서 촛불과 종이쪽지 들고 서성이는게 전부라 해도 그 소리를 소중히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네.”

 

오로지 국민들의 이해가 부족해 들어선지 100여일 밖에 안된 실용정부가 ‘기업들에게는 착한 정부, 서민들에게는 못된 정부’로 비친 것일까. 국민들이 오로지 ‘소고기 건강문제’ 때문에만 거리에 나선 것일까.

 

이명박 정부는 출범초기에 설득을 통한 통합과 조정보다는 독선과 교만의 유혹에 기대지는 않았는지, ‘귀찮지만 형식상 설득은 거친다. 하지만 조정같은 것은 없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는 일방통행식 기조로 밀어붙이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불안감으로 국민들이 거리로 나선 것은 아닌지 가슴깊이 새겨야 한다.

 

필자는 최근의 상황이 이 대통령의 본의를 벗어난 것이며 서민들보다는 기업들과 관료들 이야기에만 귀기울여 소고기와 FTA, 대운하가 추진되어 온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믿고 싶다. 정권교체 초기 잠시 미숙하여 본의와 달리 그런 것일 뿐 백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현명한 ‘임금’이 되리라 믿고 싶다.

 

그리 믿고 싶은 까닭은 그래야만 광화문 근처 도로들이 서민들 발걸음과 촛불의 온기로 뜨거워지는 그리 자랑스럽지만은 않은 일도 멈출 것이고, 청계천에도 나들이 나온 아이들의 평화롭고 해맑은 웃음소리가 다시 돌아 올 것이며, 우리 국민들이 대통령을 잘못 선출했다는 자괴감에 빠지지도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대통령은 영조가 정조에게 전한 가르침처럼 통합적인 리더십으로 반목과 갈등을 해소하고, 온 국민의 열렬한 희망인 경제 살리기에 올인(All-in)하시기를 기원한다. 소수 재벌그룹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촛불들고 모여든 ‘못난 자식들의 경제’를 앞서 살려나가셔야 할 것이다. 더불어 여야 할 것 없이 우리 정치권에도 ‘잘난 자식과 못난 자식’을 모두 아울러 보살피고 조화롭게 이끌어가려는 생산적인 모습이 넘쳐나길 간절히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