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5월
그러나 화공 모연수를 참수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원상복귀 될 수는 없었다. 원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어 노심초사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할 수 없이 호한야에게 아직 혼수가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둘러대고는 그녀를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내며 못 이룬 정을 나누게 된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복장으로 차려입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했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오른 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뒤로 하고 늙어가는 흉노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땅으로 떠났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소군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그녀의 미모를 발견하고는 날갯짓하는 것조차 잊어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에게 ‘낙안(落雁)’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그때 중원은 따뜻했지만 북쪽 변방은 차가운 바람이 부는데다 긴 여로에 시달려 소군은 병이 나고 말았다. 며칠을 쉬며 요양을 한 후 안문관(雁門關)을 나서자 흉노의 여러 장수들이 마중을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서 소군의 눈에 비친 것은 평평한 사막과 뿌옇게 날리는 먼지,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 위로 뛰노는 소와 양떼뿐이었다. 이 때 그녀의 느낌을 노래한 당나라 동방규의 ‘소군원(昭君怨)’이란 시(詩)의 ‘춘래불사춘’이란 구절은 지금도 자주 회자된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자연의대완(自然衣帶緩) 비시위요신(非是爲腰身)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구나
자연히 허리띠 느슨해 져도(몸이 야위어도), 몸매를 위한 것은 아닐지어니
- 동방규의 昭君怨(소군원)
흉노의 왕부에 도착한 호한야는 대단히 기뻐하며 왕소군과 혼례를 치르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슬픈 피리소리와 달리는 말들, 비릿한 음식, 이국의 풍경 등은 그녀에게 고국에 대한 그리움만 더해 줄 뿐이었다. ‘믿거나 말거나’이겠지만 왕소군이 흉노의 왕부에 도착한 지 3개월만에 한 원제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에 신음하다가 병들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2년 뒤 소군은 호한야의 아들을 낳았으며 그는 훗날 일축왕(日逐王)이 된다. 다시 1년이 지나 노쇠해진 호한야가 세상을 떠나는데, 이때 왕소군의 나이 불과 24세. 흉노의 전통에 따라 왕소군은 선우 직위를 계승한 호한야의 큰 아들 복주루(復株累)의 아내가 되었다. 젊은 선우 복주루는 왕소군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여 부부간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 이후 11년간의 부부생활을 마치고 복주루는 세상을 떠나는데 그때 왕소군의 나이 35세였다.
소군은 어진 마음으로 흉노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漢)과의 우호관계 유지에 힘써 이후 60년이 넘도록 평화가 지켜졌다고 한다. 그녀의 형제는 후작(侯爵)에 봉해져 흉노에 여러번 사신으로 가서 그녀를 만났고, 두 딸은 거꾸로 장안으로 와 태황태후(太皇太后)를 모시기도 했다.
한편 태황태후에게는 왕망(王莽)이라는 조카가 있었는데, 그는 후에 어린 황제를 독살, 서한 정권을 찬탈하고 ‘신(新)나라’를 세운다. 흉노의 선우는 왕망이 자신들을 무시하자, 유씨(劉氏)의 후손이 아닌 그를 중국의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다시 중국의 변방을 자주 침범함으로써 전란이 일게 된다.
자신의 노력 속에 성립된 화친이 무너지는 상황을 목도하면서 소군은 한없는 탄식 속에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도 그녀의 묘지는 내몽고 후허호트시(呼和浩特市) 인근에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가을이 되어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들은 푸름을 잃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청총(靑塚)’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왕소군과 호한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일축왕 계열이 훗날 유럽으로 들어가 고딕(Gothic)인들을 점령하고, 이를 계기로 게르만 민족대이동이 일어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로마제국의 붕괴로 이어진다. 유럽을 뒤흔든 훈족이 흉노족에서 기인한다는 설(說)이 사가들 사이에 유력하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혹자는 유럽대륙에 건설된 강대한 흉노제국이 후세의 헝가리와 세르비아로 이어진다고도 한다.
어찌 되었건 물욕에 빠진 화공의 왜곡된 붓질로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릴 뻔 했던 한 여인이 그 미모로 인해 결국은 기원전의 한(漢)나라에서 로마제국의 멸망에 이르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 한 가운데에 서게 되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한편 왕소군이 호한야에게 시집가던 그 때에 이집트에선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군주로서 클레오파트라가 활동하고 있었다. 동(同)시대를 살았던 동․서양의 두 미인을 떠올리며 대비해보는 것도 색다른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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