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한라병원

이명아명,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자신의 몸처럼 돌본다

연재종료코너/안대찬세상만사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 내린다더니…

제주한라병원 2012. 8. 29. 09:18

2012/8

역사속 세상만사- 신화 속 여자들의 한(恨)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 내린다더니…


우리 속담 중에 ‘여자가 한(恨)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지만,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이러한 얘기가 통하기는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여름 납량특집(?) 삼아 이번 호에서는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 가장 무섭게 한(恨)을 품었던 여인, 클리타임네스트라(Klytaimnestra)에 관한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트로이아 전쟁 발발의 원인이 된 ‘헬레나’와 쌍둥이 자매간이다. 백조로 변신하여 레다를 덮쳤던 제우스의 딸로 잉태되어 알에서 태어난 이들은 각자 아가멤논과 그 동생인 메넬라오스 형제와 결혼함으로써 훗날 동서지간이 된다.


그런데 클리타임네스트라가 한을 품었던 대상은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 미케네의 왕이자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이었다. 그럼 이 분노의 사연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원래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의 부인이 되기 전 이미 과거의 남편과 자식도 낳고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미모에 반한 아가멤논이 본래의 남편과 아이를 죽인 뒤 강제로 그녀를 부인으로 삼은 것이었다. 이것이 아마 그녀의 숨겨진 첫 번째 분노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그리스 연합군이 출정준비를 마치고 트로이아로 떠나기 직전, 아가멤논은 큰 사냥대회를 열었다. 여기서 커다란 사슴을 잡아 기고만장해진 그는 “아르테미스 여신도 이런 사슴은 못 잡았을 것이다” 라며 큰 소리를 친 적이 있다. 화가 난 아르테미스 여신은 아울리스 협곡의 모든 바람을 거두어 들여 출정하려던 연합군 선단을 꼼짝 못하게 한다. 당황한 아가멤논에게 여신은 그의 큰딸인 ‘이피게네이아’가 태어난 해의 수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고심 끝에 아킬레우스와 약혼시키겠다고 아내를 속이고는 딸을 불러온 아가멤논이 그녀를 여신에게 제물로 바치려하자, 아킬레우스가 이를 말려보지만 상심한 그녀 스스로 제단에 오른다. 다행히 여신이 마지막 순간에 이피게네이아를 불쌍히 여겨 제물을 사슴으로 바꾼 뒤 그녀를 여사제로 삼아서 목숨을 구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엄마로서 비정한 남편에게 두 번째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큰딸인 이피게네이아 사건을 애써 가슴에 묻고 남편을 물심양면으로 지키려했던 부인,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세 번째 분노는 아가멤논이 다양한 여성편력을 통해 자신의 헌신적 사랑을 저버린 것에서 기인한다.


트로이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아가멤논은 아폴론의 제사장의 딸 크리세이스를 첩으로 취하는데, 이로 인해 그리스연합군 진영에는 전염병이 창궐한다. 아킬레우스가 나서서 그녀를 제사장에게 돌려주라고 직언하지만 이를 불쾌히 여긴 아가멤논은 그 대가로 이번에는 아킬레우스의 여인 브리세이스를 내놓게 하여 취한다.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브리세이스를 내주는 대신 더 이상 전투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트로이아군을 공포에 몰아넣던 아킬레우스가 빠지자 전황은 역전된다. 이처럼 아킬레우스의 반발로 전세가 악화되자 아가멤논은 그녀를 다시 아킬레우스에게 돌려주기도 한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직후 아가멤논은 트로이아의 공주였던 카산드라와 그녀와의 사이에 낳은 두 아들을 당당하게 고향으로 데려오기까지 한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커다란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매불망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며 묵묵히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그녀의 분노는 곧 절정을 향해 치닫게 된다.


복수를 결심한 그녀는 남편이 목욕하러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서는 갈아입을 옷의 소매와 깃을 꿰매두었다. 그리고 목욕을 마치고 난 아가멤논이 옷을 입으려 버둥거릴 때 정부(情夫)인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남편을 살해하고 만다. 이제 막 10년 전쟁을 끝내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려던 연합군의 총사령관, 당대 최고의 업적을 이룬 아가멤논은 이처럼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 서린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이걸로 끝나지 않는다. 바로 그녀의 자식들 때문이다. 아가멤논과 그녀 사이에는 제물이 될 뻔했던 큰딸 이피게네이아 말고도 엘렉트라라는 둘째 딸과 오레스테스라는 막내 아들이 있었다. 엘렉트라는 12년만에 만날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었는데,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가 죽였던 것이다. 어머니의 한맺힌 복수가 딸에게는 또 다른 한을 갖게 만든 셈이다. (딸이 아버지에게 애정을 품고 어머니를 경쟁자로 인색해 반감을 갖는 심리적 경향을 가리켜 엘렉트라 콤플렉스라고 칭하게 된 것이 여기서 기원한다.)


결국 7년 뒤 엘렉트라는 남동생인 오레스테스가 어머니와 그녀의 정부인 아이기스토스를 시해할 수 있도록 돕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자녀들이 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엄연히 어머니를 살해한 패륜이었다. 때문에 오레스테스는 복수의 여신인 에리니에스 세 자매에 의해 광기에 사로잡힌 채 영원히 방랑하는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비록 신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기구하고 죄 많은 일가(一家)의 종말과 여인들의 한(恨)이 더위를 잊게 할 만큼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