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
체스키 크롬로프
보헤미아의 숲에서 에곤 쉴레를 만나다
▲ 봄이 되면 노란 유채꽃으로 물들어가는 크롬로프의 봄 풍경
“보헤미아의 숲으로 가고 싶다. 그곳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찬찬히 바라보며, 어둑한 곳에서 입에 물을 머금고 하늘이 내려준 천연의 공기를 마시고, 이끼 낀 나무를 바라본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 자작나무 숲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고, 나무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을 쬐며 푸른빛과 초록빛에 물든 계곡의 차분한 오후를 즐기고 싶다.” 1910년 에곤 쉴레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 안톤 페치카에게 쓴 편지의 일부처럼 남부 보헤미아 지방은 자작나무 숲과 노란 유채꽃이 한데 어우러져 그의 그림과 같이 요염한 자태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보헤미아의 젖줄인 블타바 강이 야트막한 언덕 사이에 위치한 이 도시를 어머니가 아기를 감싸 듯 살포시 휘감고 있다.
크롬로프는 쉴레의 “차분한 오후를 즐기고 싶다.”는 표현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매혹적인 곳이다. 중세시대 때 지어진 건물과 거리에는 서정적인 시가 흐르고, 강을 따라 휘어진 산 주름에는 쉴레의 예술적 감성이 새겨져 있다. 봄철에 이 도시는 심한 일교차로 인한 물안개가 이른 새벽부터 도시를 완전히 삼켜 버린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면 안개는 오전 늦게까지 이곳에 머물러 함부로 도시의 매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인내가 필요한 시간이다. 천천히 시간이 흐르면 안개는 서서히 엷은 햇살을 타고 자작나무 숲으로 사라진다. 안개가 걷힌 도시의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을 감상에 젖게 한다.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크롬로프 성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누구나 마음은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된다.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세계문화유산을 많이 봤지만 이 도시만큼 깊은 인상을 남기는 곳은 드물다. 구시가지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도시는 발품을 많이 팔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작고 아담하지만 우리말에 “작은 고추가 맵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도시는 ‘마음의 품’이 많이 드는 곳이다. 처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충 쉴레의 화보집을 넘겨보듯 이곳에 머물다 도시를 빠져나가지만 에곤 쉴레의 감성을 이해하고, 도시가 가진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인구 1만 5천의 작은 도시 크롬로프는 블타바 강의 만곡부에 위치하고 있다. 수천 년 동안 마을을 감싸 흐르던 블타바 강은 천 년의 도시 크롬로프를 보헤미아의 보석으로 만들었다. 도시가 문헌에 등장하는 시기는 1253년 비테크Vitek 가문이 절벽 위에 성을 지으면서부터였다. 이 가문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바이에른 주州의 이주민들을 모아 도시를 이루었고, 은광이 발견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해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비테크 가문은 후손이 끊기자 자신의 친척인 로젠베르크 가문에게 도시를 물려주었다.
로젠베르크 가문이 크롬로프를 300여 년 동안 다스리면서 도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때 로젠베르크 가문은 보헤미아에서 가장 교양과 품위를 갖춘 명문가로 명성을 높여 20세기 이후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이 이 도시를 찾아오게 만든 초석을 마련했다. 로젠베르크 가문은 수공업과 상업으로 이 도시를 보헤미아에 최고의 도시로 성장시킨 동시에 문화와 예술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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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 옆에 위치한 작은 카페는 느림의 미학을 잉태하는 장소이다 |
빨간 지붕과 쉴 새 없이 흐르는 강물은 쉴레 작품의 원천이 되었다 |
재미있는 장식품으로 치장한 예쁜 카페 |
3세기 동안의 로젠베르크의 통치가 끝나자 도시는 유럽에서 가장 세력이 강했던 합스부르크가家의 황제 루돌프 2세에게 넘겨지고, 다시 황제는 오스트리아의 명문가인 에겐베르크가家의 울리히에게 이 도시를 선물했다. 오스트리아의 명문가에 의해 17세기부터 이 도시는 예술과 문화의 고장으로 성장해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은 예술의 도시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가家가 이 도시에서 물러난 뒤 크롬로프는 방치되어 한때 숲이 완전히 마을을 뒤덮었을 정도로 사람들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서서히 살아나 해마다 수백만 명이 찾아오는 체코의 가장 인기 있는 관광도시로 성장했다.
보석의 도시로 들어가는 기차역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비탈진 길을 따라 20여 분 걸어가면 도시의 입구가 보인다. 제일 먼저 이 도시의 상징인 크롬로프 성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 성은 보헤미아 지방에서 프라하 성 다음으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서 있는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성은 수백 년 동안 이 도시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였다. 고딕양식과 르네상스 양식 등 다양한 시대에 걸쳐 개축되었다.
크롬로프 성은 쉴레가 자주 그림과 사색을 즐겼던 곳이다. 동굴같이 생긴 입구를 지나면 절벽과 절벽 사이에 놓인 회랑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 서면 크롬로프가 숨겨 놓은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경사진 비탈에 서면 발아래 흐르는 블타바 강, 울긋불긋한 지붕과 고풍스런 골목길, 짙은 녹음을 자랑하는 보헤미아 숲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앞뒤로 탁 트인 둥근 성탑에 오르면 영혼을 맑게 해주는 시원한 바람과, 자작나무 숲을 스치는 오렌지 빛 햇살이 비스듬히 도시를 비추고 있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관광객들로 가득 찬 도시, 블타바 강변에서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들, 벤치에 앉아 성을 올려다보며 삶의 여유를 누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은 어느새 행복한 충만감으로 가득해 진다. 왜 쉴레가 이곳을 좋아했는지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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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서 내려다 본 크롬로프의 전경 |
자연과 신 그리고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크롬로프 |
에콘 쉴레의 자화상 |
성 안으로 들어서면 여름 별궁, 겨울 정원 등 아름다운 녹색의 향연이 펼쳐져 크롬로프의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차분하고 깨끗하게 정돈 된 정원과 더위를 식혀주는 분수 등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성의 정원은 조용히 쉴레의 작품을 감상하거나 음악을 들으며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사람의 키를 훨씬 웃자란 정원수와 나무들 사이에 놓인 벤치에 앉아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있노라면 성 아래 마을에서 쉴레가 부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진다.
블타바 강이 S자로 휘어져 나가는 곳에 위치한 에곤 쉴레 미술관The Egon Schiele Art Centrum에는 쉴레와 그의 연인 발리 노이첼Wally Neuzil이 나눴던 아름다운 사랑이 시공을 초월해 존재한다. 쉴레와 크롬로프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곳이 그의 어머니 마리에 쉴레Marie Schiele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외가인 크롬로프에서 무한한 예술적 감수성을 키웠다. 육체적인 성장을 비엔나에서 이루었다면 예술에 대한 영혼과 열정은 어머니의 고향인 크롬로프에서 이루어졌다.
쉴레의 작품을 가슴에 새기며 크롬로프의 매력을 좀 더 깊이 느끼고 싶다면 중세의 멋이 흐르는 거리를 무작정 걸어보자. 지도가 필요 없을 만큼 작은 구시가지를 발길 닿는 데로 거닐면 된다.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정처 없이 헤매다 보면 또 다른 길이 새로운 목적지로 우리를 안내한다. 세월에 무뎌진 낡은 집과 둥근 자갈이 깔린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화가들 뿐 아니라 일반 여행자들에게도 크롬로프의 골목길은 아주 매력적인 장소가 된다. 소시지 굽는 냄새를 따라 골목길을 헤매다 보면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그리워질 것이다. 이때 노천카페나 레스토랑에 들어가 거품이 풍성한 필스너 맥주를 마시고, 헤어졌던 첫사랑의 연인이 그리워지면 계피향이 그윽한 카푸치노 한 잔으로 추억을 되새겨도 좋을 만큼 크롬로프는 낭만이 넘친다. 이처럼 보헤미아 숲 속에 위치한 크롬로프에서는 바람처럼 떠도는 보헤미안처럼 마음 닿는 데로 움직이면 그곳이 바로 샹그릴라가 된다. 그러나 이 도시의 건축 역사를 알고 싶은 사람은 안내 지도에 매겨진 번호를 따라가면 건물의 생생한 역사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구시가지의 중심은 언제나 광장이다. 비교적 규모가 작은 스보르노스티 중앙 광장은 다른 유럽의 광장에 비해 초라하다. 하지만 주변의 건물들은 15~17세기에 지어진 고딕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 많고, 특히 그림처럼 그려진 프레스코 외벽이 인상적인 곳이 많다. 성처럼 외부의 장식을 그림으로 장식한 이 도시의 건축물은 분명 다른 곳과 상당한 차이를 지닌다.
도시를 걷다보면 우연하게 쉴레의 영혼과 만나게 된다. 쉴레가 잠시 머물렀던 크롬로프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그 어떤 여인의 유혹보다 더 매혹적이다. 아마 표현주의 작가들이 이곳을 방문한다면 도시의 이미지를 다양하게 캔버스에 옮겼을 것이다. 누구라도 보헤미아 숲과 블타바 강 그리고 넉넉한 웃음을 지닌 이곳 사람들을 보게 되면 이 도시에 머무르는 동안은 예술가가 될 것이다. 이 도시를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도시를 마음에 새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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