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 7월
이별에 대처하는 그녀의 자세
“여기 누워봐.”
사내는 그녀에게 매트리스를 가리켰다. 그녀는 그가 시키는 대로 그 위에 가만히 누웠다. 그는 그녀의 가슴 중앙의 뼈마디 부분을 세게 눌렀다. 아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누르던 손가락을 거두고 웬 지압기 같은 것을 꺼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보네. 원래 아픈 데가 아니야.”
그는 그 기구를 그녀의 가슴에 대고 세게 눌렀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쇳덩어리가 가슴을 압박해서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기구를 잡도록 손 모양을 알려주더니 아프지 않을 때까지 누르라고 했다. 그래야 기의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진단다. 사내는 그녀를 놓고 문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실내에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조금 열린 창문 틈새로 바깥의 저녁 소리가 새어들었다.
몇 개월 동안, 자신을 부정하고 세우고 또 부정하고 세우고…… 그러면서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다가 무너뜨리는 일을 몇 번이나 반복했던가. 그러나 그럼에도 진실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찾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현실은 늘 잔혹했다.
그녀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글을 쓰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그녀 자신의 육체를 유지하는 일도 모두가 불필요하게 여겨졌다. 오래도록 힘겹게 견디며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바람에 쓸려 거리의 저 먼 곳으로 사라지는 낙엽보다도 가벼운 것으로 변해버렸다. 몸과 마음은 너덜너덜해지고, 장기들이 움직이기에 어쩔 수 없이 살았다. 갖가지 생각은 분리되거나 합쳐지거나 치환되고, 그런 급박하게 변하는 생각들은 누더기가 된 몸과 합쳐져 더욱 가슴을 짓눌렀다. 가끔 아무나에게 발악하고 또 외치고 싶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 즈음이었다.
생각들이 어디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던 것일까. 언제부터 그녀의 생각은 근거 없는 논리들로 무장해 파편들을 맞추기 시작했으며, 그것 외의 다른 사실들을 받아들일 여유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녀의 논리란 숨겨진 것들을, 은폐된 것들을 찾으려는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 논리가 굳어져 또 다른 진실을 외면하는 장애물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혐오하던 결과이고 또 그녀가 스스로 힘들어했던 것 아닌가!
신념이라고 생각하고 믿어왔던 것들이 무너지는 것은 늘 한 순간이다. 하나씩 시간을 두고 따로 오는 것이 아니라, 맞물리면서 한 순간에 불어 닥치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방에 내려가고, 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장례식 준비를 하면서도 그녀는 일부러 그녀 안의 것들을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너무 깊게 생각해서 지금은 인정하지 않는 무수히 많은 것들을 인정해 버릴까봐 겁이 났다. 그러나 언어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에 많은 것이 변해버렸음을……
그러니까, 오랜 시간 동안 꼼짝도 못할 정도로 팽팽히 당기고 있던 선 하나가 툭 끊어진 기분이었다. 그동안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무수히 많은 사건들과 감정들과 그리고 할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전혀 관계없는 여러 가지 일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그 생각은 진실로, 옳은 길로 가는 것일까?
아니.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보고 감각했던 것들 -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바로 그게 진실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흘러가던 곳, 흘러가던 모양새, 그것이 바로 진실이었겠지. 애절하면 애절한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사랑했으면 사랑한 대로……
장례식장 밖으로 나와 사람이 드문 구석에 앉아 가만히 주변 풍경들을 둘러보았다. 오랜 만에 보는 시골의 풍경이었다. 어두운 저녁인데도 저 멀리 물웅덩이를 뛰어다니는 벌레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고, 아주 오래 전에는 들었을 법한 새소리, 그리고 바람 소리를 들었다.
문자메시지, 인터넷, 전화…… 무수히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며 살았던 것일까. 벌써 여러 밤 동안 악을 쓰며 보내고 받은 그녀와 당신의 말들. 당신에게 부르짖은 그 새벽. 그녀의 말들이 향한 곳은 어디였을까? 당신일까, 아니면 그녀가 만들어낸 당신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녀가 보지도 못하고 짐작도 못하는 숨겨진 당신이었을까……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지켜보았다. 고요한 자연과 그들의 신호와 그 사이를 떠도는 마음. 마음속에 그녀 자신을 띄워놓고 가만히 쳐다보았다. 마음속의 그녀는 바람과 소리와 호흡에 자유롭게 떠다녔고,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평안해졌다. 그리고는 이런 말들을 중얼거렸다.
한때 당신을 완전히 부정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불가능했죠. 당신을 부정할 수는 있어도 그러면 당신과 함께 했던 시간도 부정하게 되는 거니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의도적인 망각일 뿐이니까.
사람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에게 죽음이란 또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육체만 남는 것일까요 아니면 마음이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일까요. 육신이 사라져 다시는 그 얼굴 볼 수 없다고 해도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걸까요? 그래요.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답니다. 육신이라는 거, 서로 구속하며 붙어 있어봐야 마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으니. 그런데 또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육체가 서로 부대껴야,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 소통해야 마음도 더 커진다는 거. 몸이 멀어지면, 소통이 없으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그런데, 이 모든 게 무슨 소용 있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똑같은 것을.
자신을 비우면 세상의 무수히 많은 것들을 담을 수가 있다죠. 내가 나를 비우면, 현재의 욕망, 이기심, 열정, 그것들이 투영된 언어…… 그것들을 깨끗하게 비워내면, 나는 당신을 담을 수 있을까요, 당신을 마주할 수 있을까요…… 당신과 지낸 시간, 내가 사랑한 당신만 남아 내 어느 곳에 담은 채 묻은 채 그렇게 흘러갈 수 있을까요…… 내 안으로 무수히 많은 당신이 흘러들고 또 빠져나가겠지요.
우리 지금 어떠하든 우리 서로를 원하고 사랑했고, 그 감정, 그 시간만큼은 진실이었을 테니, 그걸로 충분해요. 그러니 이제 서로 헐뜯고, 감정 상하게 하고, 스스로 지치고…… 그러는 거 그만 해요. 이제…… 모두 놓아줘요.
사내가 돌아온 것은 몇 분 후였다. 가슴을 압박하던 기구가 뭐냐고 묻자, 그는 기의 순환을 돕는 기구라고 말했다.
“하늘의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기구야. 피뢰침의 원리를 생각하면 돼. 사실 번개라는 것도 기의 일종이고 또 에너지의 일종이거든. 스트레스라는 것도 실은 우주의 소리를 무시했기 때문이지. 인간의 몸이라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 하나하나가 모두 에너지고 기거든. 인간의 내장과 하늘의 별들이 모두 이어져 있어. 모두가 순환하는 건데, 그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니 몸에서 기가 뭉칠 수밖에 없지.”
그래. 기가 흐르고 만물이 순환하듯 내 생도 무수히 많이 거듭하고 또 순환하겠지. 인연조차도.
그런데 이제 알 것 같아. 인연이라는 것, 그것에 집착하는 것 또한 나를 비우지 못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 그녀는 어렴풋이 당신과 그녀의 과거를 기억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몇 번이나 반복했다고 믿으며. 지난 생에 이루지 못한 당신과 그녀 자신의 인연을 이번 생에는 마무리 짓고 싶어 그렇게 악을 썼던 거겠지. 분명 그녀는 지난 생에 내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자만했을 것이고, 그래서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한 채 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이제 그 생을 다시 살고 싶어 이 삶을 살지만, 여전히 부족한 그녀는 또다시 많은 아쉬움을 남긴 채 아무것도 돌이키지 못한 채 다시 파멸해갈 것이다.
모든 것은 반복하고 또 반복하겠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죠? 그날 장례식장에서 중얼거린 말들…… 마음 속 생각들을 입 밖으로 내뱉자 정말 그럴 수 있을 거 같았어요. 이제 놓아주자는 바로 그 말……
매트리스에 누운 그녀는 문득 모든 게 잘될 것만 같다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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