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 4월
벚꽃지다
그러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래도록. 그리고 그 날도……
그 날,
며칠 밤을 새워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하고, 관련 회사 사람들을 만나 거짓-이라고 말하기만은 어렵지만, 그러나, 분명 자연스러운 진심은 아니었던 웃음을 짓고, 또다시 밤을 새우고 또 새우고,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담당자들과 회의를 하고, 또다시 밤을 새우고, 진심이었지만 거짓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웃음 짓기를 반복하여, 드디어 맡은 프로젝트를 따냈던, 그 날.
그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지쳐있었다. 발주처에서 프로젝트 수행과 관련된 원칙들과 향후 계획 같은 것들을 들은 뒤, 부서에 전화를 넣어 결과를 알리고, 남은 하루 정도는 쉬라는 말을 들은 뒤, 그는…… 길을 잃어버렸다. 정말 휴대폰을 손에 든 채로 오랜 시간을 시내 한 복판에 선 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고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말 그대로 두뇌가 활동을 멈춘 기분이었다. 단지 두 눈만 해석하지 못한 주변 풍경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러니까 평일 오후 거리를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하늘과 그리고 거리에 드문드문 핀 벚꽃들까지. 응? 벚꽃?
……벚꽃이 언제 이렇게 피었지?
그제야 문득 앞이 보이기 시작하는 듯했다. 그리고 벚꽃가루.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 사이에, 그리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깃에 벚꽃가루가 잔뜩 묻어, 도시 사이를 부유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시내버스 안에는 사람이 많다고 적다고도 할 수 없었다. 자리가 듬성듬성 비어 있었지만,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버스 뒤편 오른쪽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문이 열려 있어 버스가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불어와 그의 앞머리를 들썩였다. 하지만 그는 창문을 닫지 않았다. 이런 여유가 얼마만인가 싶었다. 버스로 보이는 풍경은 정말 어느 새 봄의 옷을 입고 있었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표정도 봄을 닮아 산뜻하고 가벼웠으며, 버스가 지나치는 건물들마저도 봄의 정취를 가득 뿜어내는 듯 보였다. 그가 이제야 그걸 인식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최근 그의 몇몇 직장 동료들이 봄을 타는 듯 보였던 게 기억났다.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이 남자의 계절이라던데, 왜 이러나 몰라. 어떤 동료는 회사 옥상에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 봄이 되자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며 건물 저 편을 멍하게 내려다봤다. 그도 동료의 시선을 따라 내려다보았지만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커피를 빨리 마시고 마쳐야 할 그 날의 업무와 일주일 동안 처리할 업무, 그리고 한 달 계획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이지 않고 떠돌았다. 따지고 보면 꼭 업무 때문만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봄의 정취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삭막한 사람인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계절에 민감하며 사람의 감정에 충실한 유형이었다. 게다가 사랑이나 연애같은 것에 매우 관대한 편이었다. 감성이 인간 생에는 어느 짧은 부분에만 주어진 축복이라고 믿으면서. 가끔은 밀물처럼 몰려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로맨스를 상상하기도 했다(그래서 ‘한 번 사랑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썰물이 되어 빠져나간 뒤에 사랑은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라는 어떤 소설의 구절을 습관처럼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는 주변은커녕 자신도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주변을 돌아보지 않게 된 것이.
버스는 여전히 한산했다. 라디오에서는 아나운서가 주말에 비가 내려 벚꽃이 거의 떨어질 거라고 예보했고, 사람들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벨을 누르고 내렸으며, 또 누군가가 버스에 올라탔고, 그러는 동안 그는 가방을 끌어안은 자세로 꼼짝도 않고 창밖 풍경만 지켜보고 있었다.
*
바로 이 자리였어.
그는 주택가 사이에 서 있던 커다란 마트의 주차장 앞에 우두커니 섰다. 그의 머리 위에서 가로등의 붉은 불빛이 힘없는 노인의 입김처럼 떨어졌다. 그는 마트의 주차장 구석에 놓인 간이의자를 오래도록 쳐다봤다. 아직도 있다니. 그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간이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아보았다. 오래전 그는 자주 그 자리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마트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봄바람을 느끼고, 아주 가끔씩은 가만히 졸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 늘 그녀가 있었다. 마트 옆에 난 골목으로 들어가 몇 분 걸어가면, 그녀의 자취방이 있었으므로.
그 해 4월 어느 날이었을 거다. 옅은 햇살이 잔잔하게 퍼지는 거리.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던 오전의 밝은 한 때. 그는 그녀와 마트주차장 간이의자에 앉아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는데 그녀가 물었다.
너는 어떤 계절이 좋아?
나? ……겨울. 너는?
……봄
그때 그는 궁금했다. 네가 사랑하는 봄은 어떤 것일까? 너의 겨울은, 그 겨울이 끝난 너의 봄은 어떤 것인지. 너에게도 웅크리고 숨죽여 울던 어떤 겨울날이 있겠지? 아니면, 생명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치명적인, 봄날의 어떤 것을,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 날, 거짓말처럼 꽃잎처럼 눈이 내렸다. 골목마다, 그녀가 사랑하는 봄날의 햇살과 따스한 바람 사이로 말이다.
그리고 며칠 전, 선배의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에도 그녀는 그에게 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미 결혼을 한 그녀는 전과 달라 보이기도 했고, 다르지 않은 것같기도 했다. 몇 마디 어색한 대화와 주고받은 술 몇 잔과 지루하게 흘러간 시간 뒤에, 그녀는 짐을 챙겨 나가며 그에게 인사했다. 잘 지내, 봄 잘 나고.
주변 사람들이, 그리고 그녀도, 왜 그렇게 봄 타령인지 알 수 없었는데…… 어쩌면 그들 또한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지난 시간을 보고 있었던 걸까?
*
늦은 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서울의 밤은 항상 붐볐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술 취한 사람들이 거리 한 구석에 모여 있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발을 굴렀다. 그는 그 사이를 걸어간다.
저 앞에서 한 여자가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다. 이상하게도 단지 표정만을 봤을 뿐인데, 그녀의 지금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걸어오고, 그는 그 앞에 섰다.
비슷한 사람들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자기와 비슷한 누군가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그녀는 번져있는 눈으로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어쩌면 그를 지나 그의 뒤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지도 몰랐다. 우뚝 솟은 빌딩들. 타인에 대한 배려 따위는 전혀 생각지 않을 만큼 개인적이고, 그러나, 무수히 많아 전혀 개인적인 친밀감 따위는 느낄 수 없는 타인들의 카니발같은 행렬. 그리고,
그녀가 여전히 비틀거리며 세상을 관통하는 듯한 흐리멍덩하게 걸어와 그의 앞에 멈춘 듯 스쳐 지났을 때, 문득 그는 그 눈빛을 향해 소리 지르고 싶었다.
잘 살아요!
아마, 그 사람은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할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아주 많고, 소란스럽고,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아주 많은, 그런 거리에 있으니까. 우리가.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그래도 그는 소리칠 거다.
제발......!
어쩌면 그녀는 그 눈으로 쳐다볼 봤을 지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제발, 편안하게, 그리고 힘들지 말고…… 좀…… 잘 살라고요.
괜히 감상에 파묻혀, 그는 도로 한 복판에서 나아가지도 뒤돌아서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을 뿐이다. 벚꽃 흐드러지게 핀, 그리고 곧 비가 내릴지도 모를, 어느 늦은 밤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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