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 5월
개와 늑대의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을 알아?”
욕조에 걸터앉아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욕조바닥부터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불숙 욕실 안으로 그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어스름히 어둠이 찾아올 무렵을 말하는 거래. 왜 그런 때 있잖아, 낮이었다가 갑자기 어두워지는 그 사이의 순간. 그 시간에 옆 마을로 놀러갔던 개들이 마을로 돌아오는데, 그 개들 사이에 늑대가 숨어서 마을로 들어온다는 거야. 그래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부른대. 그때의 하늘은 어둡고 세상은 아주 짙은 푸른빛 기운이 감돌지. 사물의 경계가 흐릿해져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지나가듯 던진 그의 말이 왜 아직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머무는 걸까. 아마 푸른빛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푸른빛, 언제나 그녀의 몸 어딘가에 고여 있던 바로 그 축축한 이미지. 그리고…… 그녀를 외면한 채 벽을 보고 말하는 것처럼 냉랭하던 그의 표정.
욕실에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수도꼭지와 욕조 바닥, 극단적인 두 지점 사이는 언제나 신비롭다.
오래전 그녀에게 늑대에 대해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찾아다니며 사진 찍는 것을 취미로 갖고 있던 남자였다. 남자는 그녀에게 늑대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늑대는 바위위에 앉아있거나, 먹이 주위를 배회하는 중이었다. 붉은 털을 가진 늑대가 땅에 쓰러진 사슴 한 마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늑대의 털은 붉은 색이 아니었다. 물어뜯은 사슴의 몸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뻘건 불같은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섬뜩함에 몸을 떨었다. 늑대가 멸종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은 몰랐다고 남자에게 말했다. 방안으로 늑대의 울음소리가 밀려들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늑대에 대해 이야기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와 인간이 함께 살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자연의 섭리에 의해 흘러갔다. 동물들은 먹이사슬에 따라 잡아먹거나 잡아먹혔다. 인간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듯, 늑대들에게도 사회가 있었다. 동료의 죽음을 슬퍼했고 일정 수가 무리를 지어 행동했다. 암수 리더들만이 종족번식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종의 무분별한 번식을 막기 위함이기도 했다. 늑대는 야생동물 중에서도 사회성이 강한 동물이었다. 늑대와 인간과 다른 동물들은 균형을 유지하면서 자연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 균형을 깨뜨린 것은 인간이었다. 기술을 통해 더 큰 힘을 갖게 된 인간에게는 욕심과 이기심이 생겨났다. 결국 인간은 약속을 깨고 늑대의 보금자리였던 숲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늑대는 방목지로 밀려나게 되었고 생존을 위해 마을에 내려와 양이나 염소 같은 가축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이빨을 들이댄 늑대가 두려워졌다.
결국 인간에게 해가되는 늑대를 박멸한다는 계획 아래 전국적으로 늑대를 포획하기 시작했다. 어떤 마을에도 예외 없이 사냥꾼들이 모여들었다. 늑대가 출몰하기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사냥꾼들의 두 손에는 총과 덫과 독이 들려있었다. 늑대들에게 현상금이 걸렸고 수많은 사냥꾼이 늑대를 잡기 위해 마을로 찾아왔다. 사냥꾼들은 무차별하게 늑대를 사냥했다. 늑대사냥은 전국적으로 이루어졌고 수많은 늑대가 잡히거나 죽임을 당했다. 마을에서도 사냥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잡은 늑대의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었고 돌려 입기도 했다. 마을과 숲을 넘나들던 늑대들이 땅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늑대들은 사람들을 피해 강 건너 숲속으로 숨었다. 사람들은 강을 건너 늑대를 사냥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강은 거세게 흐르지는 않았지만 넓고 깊었다. 사람들은 강이 자신들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고 생각했다. 강을 건넌 사냥꾼들은 대부분 늑대를 사냥할 마음을 잃어버렸다. 결국 인간과 늑대의 영역이 강을 중심으로 명확히 구분되었다.
사냥은 광기를 낳았고 광기는 더욱 사냥을 부추겼다. 이제 누구도 늑대가 해가 되는 동물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약속을 먼저 깬 것이 인간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늑대들은 광기어린 사냥으로 인해 거의 멸종 상태에 이르렀다.
강 건너 숲으로 들어가지 못한 극소수 늑대들은 살아남기 위해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해야만 했다. 개똥을 묻힌 다음 마을에 들어가 개 인 척하면서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거나 인간들이 기르는 애완동물처럼 순종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떤 늑대들은 인간처럼 두발로 걷는 연습을 하거나 기술을 배웠다. 중요한 것은 날카로운 이빨과 눈빛을 감추는 일이었다. 눈빛이나 이빨을 무심결에 드러낸 늑대들은 가차 없이 죽임을 당했다. 늑대는 영리했다. 늑대사냥 열기가 가라앉을 즈음에 사람들 틈에서 살고 있는 늑대도 있었다. 사람들 틈에서 살게 된 늑대는 가끔씩 강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두 발로 서서 강 너머 숲을 쳐다봤다. 숲에 숨은 늑대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몸 안에서 울려 퍼졌다. 그게 자신을 숲으로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에게 길들여진 늑대가 강을 건너 숲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그 늑대는 숲을 잊어버렸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게 되었다.
수도꼭지를 반대방향으로 돌리자 물도, 소리도 뚝 끊겨버린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속에 손을 집어넣는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웅웅 울린다. 그녀는 침을 한번 삼키고 멍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한다.
“일을 해도, 술을 마셔도, 사람을 만나도 어느 순간 불쑥 가슴속에서 머리를 내미는 것이 있어요. 그런 기분 알아요?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런 상태가 되면 온몸이 물속에 잠긴 듯 그렇게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요. 정체불명의 것들이 몸 안에 차오르거든요.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 상태가 시작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동안 불안하게 돌아다니기만 해요. 그것들은 몸 안에 차오르다가 더 이상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순간에 눈물이나 혹은 한숨이 돼서 밖으로 쏟아져 나오죠. 가슴이 몇 주일씩 답답하거나 아니면 머리가 아프기도 하죠.
아니요, 아무 이유도 없어요. 그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아무 이유도 없는데, 느낌이 와요. 아, 시작되려 하는구나, 하구요. 그나마 그걸 예상할 수 있는 날은 다행인 거예요. 길을 걷다가 불쑥 눈물이 나오는 바람에 곤란했던 적도 많고, 이유 없이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서 함께 있던 사람들의 기분을 망쳐놓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래요. 문제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아주 깊고 어두운 물속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나 스스로도 알 수가 없으니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기 힘들죠.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욕실 사각거울의 오른쪽 귀퉁이에 그녀의 얼굴이 걸쳐있다. 표정 없는 표정. 그녀는 근육에 힘을 주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활짝 펴기를 반복한다.
긴장과 이완.
순간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그래, 중요한 것은 ‘긴장’하고 ‘이완’된 바로 그 순간이 아니라 각각의 상태로 도달하기 위한 바로 그 과정이다. 삶의 매 순간을 결론지을 수는 없는 법. 다만 그 과정을 어떻게 지나느냐가 중요할 뿐이고, 그 과정이야말로 언제나 신비롭다.
그녀는 욕조에서 일어나 옷을 벗는다. 상의와 하의 그리고 속옷까지 모두 벗어버리고 욕조 안에 한쪽 발을 들이민다. 욕조 안에 눕자 물들이 밖으로 넘쳐흐른다. 순간 천장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그녀 어깨 위로 툭 떨어진다. 그녀는 가만히 천장을 쳐다본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물속으로 머리를 천천히 집어넣는다. 그녀는 이렇게 삶의 또 한 과정을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