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패 제주어
소멸위기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에 포함돼
거친 땅과 쉼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 형성된 제주의 보물
제목이 생뚱맞다. “뭐라고 말하는지 알겠느냐?”는 제주말이다. 제주사람이 아니면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다른 지방의 언어와 다르고 특별하다. 유네스코(UNESCO)는 지난 2010년 12월에 제주말을 소멸위기의 언어로 분류했다.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6천700여개 언어가운데 2천473개를 소멸위기의 언어로 분류한 것이다. 모두 5단계인데 제주말은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에 포함된다. 지금은 조부모 세대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그 후에는 중단되고 사라진다는 말이다.
10년 전의 일이지만 당시 제주사회의 분위기는 생생하다. 언론은 제주말이 소멸할 위기의 언어라는데 집중해서 보도했다. 말은 얼이며 생명이라는데 제주말이 사라진다면 제주인의 정신적인 토대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다소 흥분되고 과장된 우려들도 이어졌다. 그러나 유네스코가 소멸위기의 언어로 분류한 것은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제주말을 연구하는 교수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소멸위기의 언어로 분류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해 온 덕분이다. 소멸위기 언어로 분류되기 전에 ‘제주어사전’을 발간했고, 제주어 보전 및 육성을 위한 조례도 제정했다. 유네스코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제주대 강영봉 교수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철저히 준비한 것이다. 소멸위기 언어로 분류된 이후 제주말은 당당하고도 오롯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구술자료 집이 발간됐는가 하면 사단법인 제주어연구소와 제주어보전회도 설립됐다. 두 달에 한번 씩 배달되는 제주어보전회의 ‘덩드렁마께’는 고향의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정겹다. 제주어 말하기 대회라든가 생활수기 공모 등 제주말을 쓰고 지키면서 가꿔 나가려는 행사들도 많아졌다. 요즘은 신문과 방송 등 갖가지 미디어를 통해서도 제주말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문학은 제주말을 다듬고 활용하는 바탕이 된지 오래다. 음악과 연극공연에서도, 심지어 영화나 TV 드라마에서도 제주말은 어렵지 않게 등장한다. 소멸위기 언어로 분류된 이후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장맛비가 내리던 아침, 서귀포에 사는 김학준 선생이 <제줏말 사용안내서 ① 제줏말 작은사전>을 보내왔다. 반갑기 보다는 그의 정성과 열정에 감동했다. 제주말을 지키고 가꾸겠다는 일념하나로 사재를 털어 <제줏말 작은사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어린 시절 천재라 불릴 만큼 빼어난 수재였던 김학준은, 한때는 학교 선생님이었고 열정적인 교육운동가였으며 지역 언론 개혁운동의 선봉에 서기도 했었다. 가끔씩 그를 떠올리면 한국학의 선구자였던 양주동박사의 풍모가 언뜻 연상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와는 한번인가 만난 적이 있는데, 디지털시대의 제주언론 방향을 함께 고민하자는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그의 눈은 제주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빛났고, 그의 마음은 진실에 대한 목마름으로 바짝 타들고 있었다는 기억이다.
그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천재적인 집중력, 제주사랑의 열정으로 <제줏말 작은사전>이 나온 것이다. 이 책은 받은 나는 곧바로 페이스북에 ‘책 사주기 캠페인’을 제안했다. 그가 개인적으로 감수할 재정적인 손해를 걱정해서가 아니다. 그가 구상하고 있는 2탄, 3탄의 책들, <제줏말 개념어 사전>이라든가 <아름다운 제줏말 교과서>를 만들 수 있도록 그 작업에 제주사람들이 함께 하자는 의도였다. 제주말이 없어지는 걸 유네스코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시민들의 마음을 모아보자는 것이었다. 반응은 놀라왔다. 생면부지의 페이스북 친구들이 수 백 명 모여 들었다. 제주의 친구 뿐 아니라 서울은 물론 강원도와 경상도 등에서도 관심을 보여 왔다. 경상도의 어느 교수님은 이 책 2권을 주문했다. 제주사람이 아니면 이 책을 갖고 있어도 내용자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렸는데도 막무가내였다. 제주사람들의 얼이 담겨있는 제주말을 공부하고 싶다는 것이다. 충청도에 사는 한 친구는 제주출신인데 자녀들이 제주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주문한다고 메모를 남겼다.
<제줏말 사용안내서 ① 제줏말 작은사전>은 이제 제주도내 서점에서도 팔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 책 한권, 서재에 꽂혀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집안 가득 빛이 나리라 장담한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를 ‘정신의 집’이라고 표현했다. 언어를 통해 개인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면, 제주말은 제주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집단적 표상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의 시조시인 오승철의 “셔?”라는 제목의 시는 단연 으뜸이다. “셔?”는 안부를 물을 때나 찾고자 하는 사람이 집에 있는지 확인할 때, 또는 그냥 아는 집 앞을 지나가다 집이 비어 있는지 궁금할 때 쓰는 말이다. 다른 지방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제주말이다. 그는 이 시로 지난 2010년 국내 최고 권위의 중앙시조대상을 수상했다. 제주말이 중앙문단은 물론이고 세계문학과도 상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증거이다.
제주말은 거친 땅과 쉼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 형성된 언어로 그야말로 제주의 보물이다. 보물을 지키고 가꾸는 일,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이며 책임이기도 하다.
<언론인 김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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