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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속의 다른 문화와 역사 간직한 ‘타프의 성’

제주한라병원 2020. 9. 10. 15:28

 

영국 속의 다른 문화와 역사 간직한 ‘타프의 성’
웨일스의 수도, 카디프

 

 

 



영국 웨일스 방언으로 ‘카에르딥’이라 불리는 카디프는, 19세기 그 간의 부진한 역사를 딛고 세계 유수의 석탄 수출항으로 다시 태어났다. 도시에 새로운 활기가 넘쳐나면서 카디프는 영국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곳 중 하나가 되었고, 카디프 만에 조성된 매력적인 부두에 가면 도시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느낄 수도 있다. 레스토랑과 호텔이 즐비할 뿐 아니라 최첨단의 체험 과학 센터까지 들어서 있으니 말이다.


영국 속에서 또 다른 영국을 느낄 수 있는 카디프를 알기 위해서는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이 땅에 처음 뿌리를 내린 사람들은 북해에서 내려온 켈트족이다. 이들은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타프강에 모여 살았지만, 기원전 1세기부터 5세기 전반까지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그 후 앵글로 색슨족이 들어와 원주민인 켈트족과 갈등 관계를 지속하다가, 1284년 웨일스는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잉글랜드에 맞섰지만, 패한 뒤 대영제국에 편입되었다. 현재 영국은 4개의 지역, 즉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 등이 합쳐져 ‘유나이티드 킹덤’을 이룬다. 그 결과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와 웨일스 수도인 카디프는 잉글랜드와 인종도 다르고 언어와 문화도 다르다.

 

영어와 웨일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카디프는 영국에서 아홉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자, 19세기부터 석탄 수출항과 기계 공업이 발달하였다. 이곳의 지명인 카디프는 ‘타프의 성(城)’이라는 뜻이고 현재 구시가지가 있는 도심과 카디프 베이, 이렇게 두 곳을 주요 관광지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20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카디프 시내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카디프 성이 눈에 들어온다. AD 55년, 로마군이 현지 원주민이었던 켈트족의 공격을 막기 위해 요새를 지은 것이 성의 시초이다. 11세기 때는 영국으로 들어온 노르만족이 그들 특유의 건축양식으로 성의 외벽을 쌓고 정원을 꾸미는 등 로마의 요새에다가 성벽과 성채를 더해 튼튼한 성으로 개축하였다. 그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성을 거쳐간 많은 성주가 카디프 성의 모습을 보호하거나 개조했는데, 19세기 영국 최고의 건축가 윌리엄 버지스와 이 성을 상속받은 뷰트 후작에 의해 지금의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으로 바뀌었다.

 

로마군이 현지 원주민이었던 켈트족의 공격을 막기 위해 요새가 성의 기원


뷰트 후작의 할아버지는 그 당시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으로, 카디프를 작은 시골 마을에서 남부 웨일스의 석탄을 전 세계로 수출하는 항구 도시로 탈바꿈시킨 인물이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카디프 성을 뷰트 후작이 건축가 윌리엄 버지스를 통해 로맨틱한 중세풍의 아름다운 성으로 개축하였다. 이때 세워진 것이 46m 높이의 시계탑을 비롯해 서로 생김새가 다른 4개의 탑이다. 1947년 뷰트 후작의 5대 후손이 성을 카디프시에 기증했으며, 현재 성안에는 웨일스 연대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성안으로 들어서면 여러 개의 아름다운 방들이 있고, 방마다 세련된 타일, 벽화, 조각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다.

 

 

카디프의 중심 거리, 퀸 스트리트


아스라한 뷰트 후작 가문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카디프 성을 등지고, 인상주의 화가 모네와 르누아르, 마네, 피사로, 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카디프 국립미술관이 여행자들의 눈과 마음을 매혹한다. 입장료도 없는 카디프 미술관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미술관이지만, 우리에게도 익숙한 명화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모네가 그린 ‘황혼에 물든 베네치아의 산 죠르조 마조레 성당’, ‘루앙 대성당’, ‘수련’ 등 17점을 볼 수 있고, 여성의 초상화를 잘 그렸던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파리지앵’, 빈센트 반 고흐가 1890년 7월 죽기 3일 전에 완성한 ‘비 내리는 오베르’ 등도 있다. 또한, 프랑스 최고의 조각가인 로댕의 작품도 몇 작품이 있는데,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키스’와 ‘영원한 봄’ 그리고 ‘빅토르 위고의 얼굴’ 등 카디프 미술관은 유럽의 고전부터 프랑스의 인상주의까지 다양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모네의 그림을 보다 보면 그와 절친했던 인상주의 화가 알프레드 시슬레가 문득 떠오른다.


사실 영국의 카디프와 프랑스 출신의 시슬레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것 같지만, 시슬레는 이 도시에서 사랑하는 여인, 외제니 르수제크와 카디프 시청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897년 여름날, 시슬레는 자신을 후원하던 한 사업가의 주선으로 영국 웨일스와 카디프 해안으로 여행을 올 수 있었다. 이 여행에는 오랫동안 시슬레의 모델이자 아내로 살아온 다섯 살 연하의 외제니도 함께했다. 1867년 스물일곱 살의 화가 시슬레는 모델 외제니와 사랑에 빠졌지만, 둘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살았다. 후원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난한 인상주의 화가는 외제니와 오늘도 어제처럼 살았을 것이다. 카디프 해안에서 여름을 보내며 모처럼 여유 있는 삶을 누렸고, 이들은 8월 5일,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 신고를 하였다. 두 사람이 함께 산 지 30여 년만이다.

 

시슬레가 1867년 결혼식을 올린 카디프 시청의 모습 <사진/카디프 시청 제공>


시슬레는 평생 풍경화를 그렸지만, 바다를 주제로 그림을 그린 적은 없었다. 하지만 거칠게 몰아치는 카디프의 바다는 시슬레의 마음을 매혹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랑스러운 외제니가 그해 세상을 떠나자, 자신도 암에 걸렸다. 1899년 1월 시슬레는 절친이었던 모네에게 모든 것을 부탁하고, 만 60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시슬레는 카디프의 해안을 사랑했고, 아내 외제니와 함께 즐겁게 지냈지만, 이들에게 이 여행은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레이디스 코브 해변의 스토 록, 저녁’, ‘절벽 위에서’ 등 아름다운 해변의 모습이 시슬레의 붓을 통해 카디프의 파도와 바다가 캔버스에 고스란히 담겼다.


도시의 풍경은 그다지 볼거리가 많지 않지만, 시슬레의 붓으로 그려진 해변과 카디프 미술관에서 만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들은 카디프 여행의 백미를 장식한다. 영국 속에서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그리고 역사를 가진 웨일스. 그 중심에 있는 카디프는 영원히 잊지 않는 여행지가 될 것이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시슬레가 그린 <레이디스 코브 해변의 스토 록, 저녁>

 

카디프 미술관의 대표작인 모네의 <황혼에 물든 베니스의 산 죠르조 마조레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