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문턱에서 만난 숲의 선물
머체왓숲길 |
대설이 지나고 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한라산이 제주도를 겨울로 이끈다.
매서운 바람과 추위에 산보다는 숲을 많이 찾을 것 같은데 의외로 사람들은 겨울 숲을 여름보다 찾지 않는다. 그런 중에도 외각지에 뚝 떨어져있는 숲은 사람의 발길을 더 찾아보기 힘들다. 숨 가쁘게 지나간 올 한해를 돌아보며 조용히 정리하는 곳으로 나는 ‘한남리 머체왓숲길’을 찾았다.
오랜만에 찾아왔더니 입구는 어느새 관광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숲 입구는 혼잡하다. 이 외진 곳에 어울리지 않는 공사로 숲이 두 동강이가 날 듯 여기저기 중장비와 파헤쳐진 규모가 겁이 날 정도다. 어수선한 입구를 지나 숲으로 들어서면 사뭇 다른 분위기로 찾는 이의 마음을 진정시켜준다. ‘한남리’는 ‘한라산의 남쪽에 위치 한 마을’이란 뜻처럼 따뜻한 남쪽의 기운이 숲에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일까? 따뜻한 기운을 좋아하는 ‘조록나무’ 군락이 초입부터 눈길을 끈다.
적갈색 나무껍질의 ‘조록나무’는 바람에 민감해서 부는 바람의 반대방향으로 잘 휘어지는데 이곳의 조록나무들이 바람의 방향을 말해주듯이 한쪽으로 휘어져 자라고 있다. 돌무더기위에 만들어진 숲 ‘머체왓’이란 지명처럼 돌덩이 하나를 여러 나무가 뒤엉켜 감싸며 자라는 모습은 여느 곶자왈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이름만 들어도 미소 짓게 하는 ‘느쟁이왓 다리’는 이제부터 딴 세상으로 안내 하겠다는 무언의 신호처럼 놓여있다. 올 가을 유난히 아름답던 단풍처럼 잡목들 사이 마른 가지에 붉게 매달려있는 ‘청미래덩굴’ 열매가 탐스럽게 빛나고 있다.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다가 눈높이에 길은 나무계단을 놓아 둔 것처럼 사람들의 발길로 패어진 길에 나무뿌리들이 줄줄이 나와 있어 괜히 미안해진다. 미안한 마음에 고개 숙인 발아래 ‘겨울딸기’가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맺고 있다. 겨울에 무슨 딸기야? 하지만 남쪽에 있는 오름과 숲에는 ‘겨울딸기’를 종종 만날 수 있다. 산딸기가 풍성한 여름에 경쟁을 피해서 매서운 추위에 애써 열매를 맺는 겨울딸기를 보면 자연에서 정말 많이 배우게 된다. 탐스러운 유혹에 그냥 지날 칠 수 없어 몇 알 따먹어보면 코끝 시릴 때 숲에서 주는 작은 선물을 받는 기분이다. 또한 지나는 이의 어깨를 스칠 만큼 풍성하게 자란 삼나무 숲길은 그냥 지나기 너무 아까워서 눈으로 가슴으로 머리로 담으니 또 하나의 선물이다.
숲이 끝나는가 싶으면 또다시 편백나무 숲이 기다리고 어느 사이 교목들이 울창한 숲에 들어서면 용암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거대한 궤’를 만나게 된다. 오래 머물기에는 음산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곳이지만 무엇이든 삼켜버릴 듯 벌어진 큰 용암석이 만든 깊은 골이 금방이라도 거대한 용암이 흘러 갈 듯하다. 협곡을 지나면 빛이 드는 곳에 쉼터가 기다린다. 너무나 건강한 나뭇잎이 고마울 정도로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팽나무가 멀리 바다를 담을 수 있는 카메라 앵글을 만들어 주고 있다. 차 한 잔의 여운을 뒤로하고 다시 만나는 길은 ‘머체왓 숲길’의 2부처럼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순간 시야가 시원해지는 걸 느낀다. 저 푸른 초원에 그림 같은 집은 없어도 초록의 초야가 멀리 하늘과 바다를 이웃 삼아 평화를 노래하고 있다.
시멘트 포장길과 숲을 다시 들어가는 두 갈래 길에서 따뜻하게 내리는 햇볕이 좋아 망설임 없이 시멘트 길을 따라 걸으니 양쪽으로 높게 자란 삼나무가 바람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시멘트 길에서 안내소 길을 마다하고 남들이 잘 안가는 계곡을 끼고 만들어진 숲길을 따라 간간히 비치는 햇살을 즐기며 걷다보면 어느새 머체왓숲길이 끝나고 있다. 나가는 입구에서 평상가득 누가 널어놓은 듯 소복하게 떨어진 ‘구실잣밤’ 나무 열매가 올해 유난히 풍성했던 가을을 이야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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