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에 깔린 들꽃과 인사하며 다다른 작은 습지
애월 봉성리 벵듸
4월이 된 제주도는 들썩인다. 온갖 축제와 산에 들에 춤추는 꽃물결로 온 섬에 활기가 가득하다. 벚꽃 가로수에서 꽃눈이 날리는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있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고사리 장마가 시작된다. 비에 꽃이 다 떨어져서 아쉬워 할 사이도 없이 무럭무럭 자란 고사리가 섬사람들을 산과 들로 불러낸다. 덩달아 설레는 마음에나는 벵듸 위에 작은 생명수인 습지를 찾아 어림비로 향한다.
봉성리 교차로에서 금악리를 향하는 중산간도로를 따라 3km정도 달리다보면 오른쪽으로 작은 오름 하나가 보인다. 아니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릴 정도로 낮다. 애월읍 봉성리의 ‘가메오름’이다. 제주도의 오름 중에 손에 꼽힐 만큼 작은 비고를 가지고 있는 오름이라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지만 단숨에 올라간 능선에서 펼쳐지는 풍광은 결코 낮지 않다. 북동쪽으로 펼쳐지는 오름 물결과 그 너머로 한라산이 선명하게 보이는 날에는 감동이 몇 배나 더한다.
부드럽게 드러나는 분화구를 따라 능선을 걷다보면 나도 모르게 까치발을 하고 걷게 된다. 빛바랜 지난 풀들 사이에 난초인 듯 고운 자태로 피어 있는 ‘산자고’와 누구를 기다리다 백발이 되어 버린 ‘할미꽃’이 지천에 깔려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꽃들과 인사하다보면 북서쪽으로 드넓은 초지의 초록 물결 가운데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작은 습지가 하늘을 담고 있다.
어느 오름 탐방객이 이 습지를 ‘맹꽁이 왓’ ‘하늘거울’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는 글을 본 기억이 난다. 유능한 작명가인 듯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초지의 주인을 만나지 못해서 예전부터 불리어지는 이름이 있는지에 대한 조사를 못 해 늘 숙제로 남아 있는 곳이다.
개구리자리 | 산자고 |
습지 가득 찬 물위에 새들이 무리지어 놀고 있다. 혹시나 인기척에 날아갈까 언덕에 주저앉는데 예민한 청각에 들키고 말았나보다. 군무를 이루고 날아가는 모습에 미안해서 한참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려보지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능선 아래 습지 쪽으로 길이 있어 가까이 갈 수가 있다. 이곳은 평평한 지대 빌레(암석)위에 물이 빠지지 않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습지이다. 작년 여름에 무성하게 자랐던 왕고랭이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지만 가장자리에 파릇파릇 수생식물들이 올라오고 있다.
짙은 흙색으로 물의 깊이는 알 수 없지만 긴 장화를 신었다면 조심스럽게 물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오름의 능선이 병풍이 되어 주듯 바람을 막아 찰랑이는 물결이 곱고 맑다. 살랑살랑 물결 따라 무엇인가 움직인다. 메뚜기 종류인데 손톱만한 곤충이 뒷다리를 개구리 헤엄치 듯 움직이는 앙증맞은 모습이 기특하고 신기하다.
풀솜대 | 할미꽃 |
질퍽한 물가에 네모난 발자국의 주인은 노루인가보다. 넓은 초지를 지나 만나는 이곳은 노루의 오아시스일 것이다. 이 물이 마르지 않고 맑게 오래 오래 지켜졌으면 하는 바람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데 성질 급하게 빨리 핀 노란 ‘개구리자리’ 꽃이 방긋 웃는다. 다시 오름에 올라 내려다 본 습지는 주변의 초지를 더욱 짙은 초록으로 윤기를 더해 주는 듯하다. 이 풀을 먹고 자랄 가축들은 아주 건강하게 자랄 것 같은 기분은 습지가 오염되지 않고 맑게 보존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렇게 많은 생명체의 생명수인 습지를 안고 있는 벵듸는 개발의 물결에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해발 200~600m 지역인 ‘중산간’은 제주도의 해안 저지대와 한라산을 연결하는 생태축 즉, 허리역할을 하고 있는 지역으로 제주만이 갖고 있는 숲, ‘곶자왈’과 지하수 충전지대인 ‘뱅듸’가 드넓게 자리 잡고 있는 중요한 곳이다. 그렇기에 날갯짓이 힘들면 쉬어가는 새들과 목마른 노루들의 오아시스인 이곳의 습지가 영원히 마르지 않고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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