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추위 이겨낸 인동초․화살나무 새순이 반겨
애월읍 어림비 벵듸
▲ 소이터
잔잔한 호수의 물안개가 보고 싶어 이른 아침 아직 찬바람에 코끝이 시린 날씨지만 집을 나섰다. 제주도는 호수를 찾아보기 힘든데 어딜 가나?
누가 숨겨두지 않았지만 숨어있는 작은 호수를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서부산업도로를 달리다보면 구(舊)길옆으로 ‘삼리목장’이 있다. 이곳도 어림비 일대에 속하는 지역이며 애월읍 봉성리, 곽지리, 금성리의 마을 공동목장이다. 남쪽으로는 북돌아진오름과 괴오름, 폭낭오름이 포개어 있으며 길 건너 마주보면서 바리메오름이 이웃하고 있어 세 개 마을에서 방목하는 소와 말들이 풍요롭게 풀을 뜯어 먹으며 자랄 수 있는 목장으로써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 곳이다.
이 좋은 조건에 하나 더 보태면 아니 꼭 필요한 것이 먹는 물일 것이다. 목장 길을 따라 조금만 걷다보면 구름과 멀리 오름의 반영이 비치는 작은 호수와 같은 습지를 만나게 된다. 아침바람에 물결이 찰랑찰랑 잔잔한 노래 소리처럼 들린다. 어느 맑은 날에 파란 하늘 뭉실 뭉실 떠있는 구름과 멀리 오름이 잠겨있던 반영에 탄성을 자아냈던 그 날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찾는 이의 가슴을 일렁인다. 누가 이렇게 많이 밟고 지나갔는지 습지 둘레를 돌 수 있게 길이 만들어져 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심이라 요즘 습지에서 흔하게 보는 개구리알과 도롱뇽알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건강한 노루의 배설물과 조류의 흔적이 반갑다. 습지 쪽으로 길게 뻗은 찔레 줄기에 파릇파릇 새순이 앙증맞게 올라오는 모습이 미소 짓게 한다. 한 쪽 면은 물이 나가지 못하게 시멘트로 담을 만들어 놓았지만 바닥에는 별다른 장치 없이 상당한 물이 고여 있는 걸 보면 주위에 물이 나는 곳이 있거나 내가 흐르는 곳이 있는 듯하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물이 고여 있지만 자연 습지가 아니라 우마들의 급수장으로 만들어진 곳이라 딱히 이름이 없다고 한다. 이름은 없지만 뭐라고 불리어지지 않아도 동식물의 생명수이자 주위의 경관을 아름답게 한 층 높여주는 이런 멋진 습지가 오래오래 남아 주었으면 한다.
마열매 | 덧나무 |
찰랑이는 물결 소리를 뒤로 하고 목장 길을 안으로 들어간다. 삼나무 가로수에 바람을 기다리는 살이 오른 꽃가루가 이제나 저제나 터질 준비를 하고 있다. 씨를 날려버리고 한쪽만 남아 말라버린 박주가리 열매 집이 시집 장가간 자식을 기다리는 고향집 우리네 부모님 모습 같다. 길 가장 자리에 쳐놓은 철조망을 감고 햇볕에 반짝이는 ‘마’ 열매가 곱기도 하다. 매서운 겨울을 이겨내며 새봄까지 잎이 시들지 않는다는 ‘인동초’에 새순이 나고 가지에 날개를 달고 있는 ‘화살나무’의 겨울눈에서 태어날 새 생명이 기다려지는 목장 길이 즐겁다. 동행과 함께 그림자놀이도 해본다.
새 친구들과 눈인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에 살짝 가려진 아침 햇살이 반짝이는 물빛에 고개를 돌리면 또 다른 습지가 있다. ‘소이터’라고 부르는 물이 고여 있는 ‘소’이다. 정지내라고 하는 내가 흐는 곳에 물이 고여 작은 소를 이루어 옛날 테우리와 농부들의 갈증을 풀어주었으며 테우리들은 산신제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 뒤 우마들의 급수장으로 시멘트로 사방에 둑을 만들어 지금도 그 모양으로 남아 있다. 서쪽 낭떠러지 아래 계곡을 따라 흘러가는 물은 애월읍 금성리의 ‘금성천’으로 흘러간다. 둑에 막혀 쓸려가지 못한 토사들이 쌓여서 작은 한반도 모양으로 섬처럼 보이는데 그 곳에 또 다른 생명들이 파릇파릇 자라고 있다. 하지만 흘러가지 못한 토사들이 점점 커지면 물의 흐름을 막아버려 또 하나의 생명수인 습지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누가 찾아보지도 않는 습지이지만 홍수피해를 막아주고 물 속에 알을 낳는 잠자리와 같은 곤충과 파충류 등 연쇄적으로 사라질 미래에는 우리 인간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사라질 미래를 걱정하게 되는 현실에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다.
인동초 | 찔레나무 |
이곳을 찾았던 지인은 학창시절 친구들과 소풍을 즐겼던 곳이라며 지난날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충분히 지금도 소풍을 즐길 수 있을 만큼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멋지고 아름다운 호수는 아니지만 소박한 모습으로 지난 추억과 함께 찾는 이를 반겨주는 어림비 벵듸의 소중한 습지 매력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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