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0
피렌체Firenze 안개 속에 흐르는 사랑
사랑의 슬픔이 촉촉이 배여 있는 소프라노의 애절한 목소리가 극장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신다. 오페라 〈나비 부인〉의 아리아 ‘어떤 갠 날’이 잔잔하게 흘러나오면서 시작되는 영화 〈전망 좋은 방〉은 사람들에게 진실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 준다. ‘꽃의 도시’로 불리는 피렌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는 여자 주인공 루시를 통해 참사랑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 아름다운 사랑이 흐르는 도시 피렌체는 루시의 사랑 외에도 단테가 평생을 받쳐 사랑한 베아트리체의 서글픈 향기가 묻어 있다.
16세기 찬란했던 르네상스 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피렌체는 단테의 고향이자 인본주의와 예술이 화려하게 꽃을 피운 곳으로 유명하다.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의 주도州都인 피렌체는 단테, 보카치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유명한 예술가들의 업적과 그들의 일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토스카나 최고의 부자인 메디치 가家의 막대한 후원 아래 서민적이고 종교적인 건축물과 조각, 회화, 문학 등 아주 다양한 형태의 예술 장르가 시도되고 발전된 곳이 바로 피렌체이다. 무엇보다도 이 도시가 가진 매력은 단테의 아름다운 여인 베아트리체의 자취를 만날 수 있어 흥분과 설렘이 사람들의 발길을 재촉한다.
철새처럼 여러 도시를 기웃거리다 찾아 든 피렌체는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아름다운 이미지를 제공한다. 세상 사람들은 피렌체를 ‘체타 델 피오레(꽃의 도시)’라 부르고 영어로 플로렌스Florence라 한다. 이탈리아어로 피오레, 영어로 플라워는 ‘꽃’을 뜻하는 Flore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꽃의 도시답게 피렌체는 백합을 도시의 꽃으로 정하고 있으며 이 지역의 명문 가문의 문장과 휘장을 보면 백합을 많이 볼 수 있다. 거리를 걷다 보면 백합 문양의 장식과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겨울철이면 매일 내리는 가느다란 빗줄기가 바쁜 여행자의 마음과 걸음을 붙잡고, 낮게 드리워진 회색 빛 하늘과 두오모 성당의 붉은 지붕 쿠포라가 단테의 슬픈 사랑을 대신 보여 주는 듯하다. 이탈리아 중부에 자리한 피렌체는 사람들의 생김새나 건축물 등 여러 면에서 남부 이탈리아의 모습과는 달리 서유럽의 도시 냄새를 많이 풍긴다. 르네상스 때 풍성했던 자유 의지가 도시 전체를 감싸는 듯 가는 곳마다 싱그러움과 활력이 넘친다. 사실 피렌체는 예술의 도시 파리를 능가하는 예술인들과 13∼15세기에 만들어진 훌륭한 작품들이 넘쳐 나 정말 르네상스 시대의 정수를 보여 준다.
피렌체 여행은 피렌체 공국의 종교적 중심지인 두오모 성당에서 시작된다. 뾰족한 탑들이 지붕 위를 가득 메우는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과는 달리 이곳은 흰 색, 선홍색, 녹색의 화려한 대리석들로 외관을 장식하여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높이 114미터에 3만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성당은 카메라 프레임 안에 모두 담기가 어려울 만큼 웅장하고 거대해 세계 3대 성당으로서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특히 내부는 세계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작품과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 중 놓쳐서는 안 될 작품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이다.
육중한 두오모 성당을 빠져나오면 바로 맞은편에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산 죠반니 세례당이 있다. 단테가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은 곳으로 유명해 사람들은 꼭 이곳을 방문한다. 특히 세례당 입구에는 로렌조 가베르티가 30년에 걸쳐 만든 웅장하고 정교한 청동문이 있는데 항상 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문에는 아담과 이브의 창조, 노아의 방주 등 성서의 창세기와 관련된 10가지 이야기가 검은 바탕에 노란색으로 조각되어 있다. 미켈란젤로가 이 문을 보고 ‘천국의 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박물관처럼 모든 것들이 예술품 같은 피렌체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끄는 곳은 뭐니 뭐니 해도 유럽 3대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우피치미술관이다. 성수기인 여름철에 가면 관람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입구부터 장사진을 치고 줄을 서 있어 이곳이 얼마나 인기 있는 곳인지 실감할 수 있다. 길게 고무줄처럼 늘어선 줄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과 관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합하면 거의 하루가 소요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랄 것이다. 미술관 안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특히 르네상스 시대를 풍미했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 등의 작품들을 볼 수 있어 인내심을 발휘하면 기다린 대가를 충분히 보상해 준다.
개인적으로는 우피치미술관보다 가장 가고 싶은 곳이 두 곳이 있다. 하나는 단테의 생가이고 다른 하나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베로키오 공방 시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친구 보티첼리와 함께 차렸던 술집 ‘산드로와 레오나르도의 세 마리 개구리 깃발’이 있던 곳이자 피렌체를 휘감고 도는 아르노 강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베키오 다리이다.
단테의 생가는 두오모 성당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지만 비좁은 골목길이 서로 얽혀 있어 쉽게 찾지 못한다. 하지만 광장 주변에 예쁘게 경찰복을 입은 여경에게 단테라는 단어만 말해도 친절하게 길을 일러 준다. 일 크로소라는 이름을 가진 골목길에 접어들면 다소 어둡고 칙칙한 그의 집이 나타난다. 이 골목길에는 단테의 생가와 일명 단테 교회라고 불리는 성 마가레 교회가 엄숙하고도 근엄하게 자리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단테 생가가 공사중이라 내부를 볼 수 없어 마음이 무척 상하였다. 개인적으로 피렌체는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 이번에도 단테 생가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많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처음엔 단테 생가를 못 찾아서 돌아갔고, 두 번째는 공사중이라 발길을 돌려야 했다. 어쩌면 그와의 인연이 아직도 안 된 듯하다.
그러나 생가 맞은편에 있는 단테 교회에서나마 그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1032년에 지어진 이 교회는 내부가 10평도 안 될 만큼 작지만 단테의 향수로 가득 차 있다. 단테는 오래 묵은 촛불 향기가 자욱한 이곳에 자주 찾아와 신앙심을 키웠고 시적 영감을 얻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그의 여인 베아트리체를 만난 장소이기도 하다.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의 작은 글씨가 이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베아트리체를 만난 장소이지만 단테가 도나티가 가家의 젬마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이 교회에 이상적인 여인 베아트리체와 현실의 여인 젬마의 무덤이 함께 있다는 것이 조금은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단테는 행복한 사람일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평생 마음으로 사랑했던 베아트리체와 그의 세 아들을 낳아 준 젬마가 한 곳에 누워 있다는 것이…….
단테 생가에서 벗어나 좁은 골목과 비교적 넓은 광장을 지나고 나면 힘찬 강물이 흐르는 아르노 강변에 도착한다. 강에서는 젊은이들이 조정으로 체력 단련을 하고 있고, 유명한 베키오 다리는 여행자들과 피렌체 시민들로 북적거린다. 피렌체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베키오 다리는 길이는 짧지만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아치 교이다. 다리 양 옆으로 금은 보석상가들이 모여 있어 피렌체의 금은 세공 기술을 잠시 엿볼 수 있고, 다 빈치나 단테가 여기에 서서 아르노 강물을 바라보며 그 어떤 상념에 잠겼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정말 배[服]를 가릴 정도로 긴 수염을 한 다 빈치가 여기 어디쯤에서 멋진 요리사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있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물론 지금은 그가 운영했던 술집은 없어졌지만 해질 무렵 석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베키오 다리의 풍광이 그 시대의 분위기를 대신 전한다.
다리를 지나 왼쪽 강변을 따라 10여 분 걸어가면 그리 높은 언덕은 아니지만 도시의 중심인 붉은 쿠포라와 빨간 지붕을 가진 도시 전체가 눈 안으로 들어오는 미켈란젤로 광장에 다다른다. 광장 맨 위에 서면 정말 가슴 벅찬 피렌체의 전경이 그림 엽서처럼 그려진다. 광장 중심에는 미켈란젤로 광장을 상징하듯 모조품인 다비드 상이 은은한 광채를 내며 서 있다. 여행 책에서 이곳은 꼭 석양이 지기 전에 올라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도시의 풍광을 감상하라고 적혀 있다. 그 이유는 붉은 태양이 아르노 강 위에 세워진 베키오 다리 위에 걸리면 말 그대로 피렌체에서 가장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광장 주변은 연방 눌러 대는 관광객들의 카메라 후레시가 여기저기에서 터진다.
물론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저물어 가는 피렌체의 석양을 감상하겠지만 며칠 동안 머물며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석양보다는 이른 새벽의 도시 전경을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아침은 새벽을 기다린 사람에게만 오듯 미켈란젤로 광장에 일찍 나와 안개로 둘러싸인 피렌체를 본다면 꽃이 이슬을 품은 듯 묘한 느낌의 경치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성당, 교회 등 많은 곳들이 처음에는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신기해서 르네상스 시대에 푹 빠지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별다른 이미지를 갖지 못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 광장을 산책하며 발 아래에 깔린 도시를 곱씹으면 아마 평생 잊지 못할 피렌체의 이미지 하나쯤은 가져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이 광장이야말로 피렌체에서 가장 ‘전방 좋은 방’이 아닐까 생각한다. 분명 단테도 이 광장에 앉아 베아트리체를 생각하며 아름다운 시를 썼을 것이다. 전망 좋은 이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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