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와 한 권의 책이 한 시대를 움직인다
고교 시절 스카라극장에서 본 영화 <영광의 탈출>은 감수성 짙은 시절이어서 감명 깊었습니다. 1960년에 제작된 3시간이 넘는 대작 <영광의 탈출>은 이스라엘의 건국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역사적 영화입니다. 영화의 내용보다 ‘영화음악’이 더 유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처음으로 도입된 6번 트랙 입체음향으로 들려주는 어네스트 골드가 작곡한 웅장한 영화음악은 1961년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였으며 MBC 주말의 명화 프로그램의 ‘시그널 뮤직’으로 오랜 세월 사용되어 귀에 익은 음악으로 친숙하게 들려왔습니다. 레온 율리스의 유명한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거장 오토 프래밍거 감독이 만들고 명배우 폴 뉴먼, 에바 마리 세인트, 살 미네오, 리 J 콥, 랄프 리처드슨 등이 출연했습니다.
2차대전 이후 1947년 영국 통치하의 팔레스타인으로 건너오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영국은 강제로 체포하여 키프러스 섬에 마련된 수용소에 집단으로 수용시킨 뒤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이런 이면에는 유태인 그리고 아랍인들 사이에서 줄타기식 약속을 남발한 영국의 미묘한 입장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어둠을 타고 몰래 섬에 잠입한 한 청년 아리 벤캐넌(폴 뉴먼)은 수용소에 머무르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 2,800여명을 팔레스타인으로 빼돌릴 거창한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이름하여 ‘엑소더스’(EXODUS), 성경 출애급기에 나오는 말이며 이들을 탈출시키는 배의 이름으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줄거리는 황당합니다. 팔레스타인은 2천년 동안이나 정착해 있던 사람들이고 이스라엘은 2천여년 전에 거주한 적 있다면서 무단으로 팔레스타인 땅을 침입한 것입니다.
만일 어느 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 만주로 하나둘씩 이주하여 깃발을 꽂고 ‘여기는 광개토대왕의 나라 고구려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현재 살고 있는 중국인들을 강제로 몰아내고 ‘고구려’를 건국한다면 말이 될까요?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유엔의 다수 국가들은 처음에 이 팔레스타인 분쟁에서 압도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을 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0년 조금 넘은 세월이 흘러서 제작된 것이 <영광의 탈출>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엑소더스’의 승선한 유대인 승객들은 목숨을 건 단식 투쟁으로 전세계 지식인들의 양심을 울린 뒤 팔레스타인의 하이파 항에 안착한 걸로 왜곡됐습니다. 전 국민이 싸우면서 일하며 ‘골리앗’ 아랍과 대적하는 모습은 1970년대 근대화 과정을 거친 한국엔 모범으로 제시돼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스라엘은 선(善)으로,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이스라엘을 둘러싼 아랍 국가는 악(惡)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스라엘의 600만 인구가 1억명이 넘는 아랍 국가 국민들에게 포위돼 불안한 삶을 이어간다는 동정적인 시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2년간의 전쟁에서 약 1백만명의 팔레스타인들은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거주지 웨스트 뱅크와 가자지구까지 점령했습니다. 현재 1천만명으로 추산되는 팔레스타인들은 유랑민이 되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1948년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했으나 모두가 허사였습니다.유엔안보리 결의안 242호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무력에 의한 영토 강점’으로 규정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유엔 결의안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무장정파 하마스는 유대인을 증오한 나머지 이스라엘인들에게 무차별적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크고 작은 양측의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 유엔에서 정식국가로 승인을 받게 된 2012년을 계기로, 수천명의 팔레스타인이 학살당하면서 이스라엘 정권은 수 천명 학살이라는 국제여론과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이라는 국내 여론을 모두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전쟁과 휴전이 이어져 평화와 공존을 위한 더딘 발걸음도 무색하게 지난 7월 8일 하마스의 폭격으로 이스라엘의 청소년 3명이 숨지자 이스라엘군은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핵무기, 화학무기, 생물학무기와 함께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무기인 백린탄을 가자지구 상공에서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살갗에 닿으면 타들어 가는 백린탄은 살과 뼛속을 파고드는 무기다. 닿은 부분을 도려내지 않고는 사실상 끌 도리가 없다. 지금 지구에서 일어나는 폭력 가운데 가장 잔인한 포격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땅굴을 파 공격한다고 휴전을 거부하다가 지난 8월 26일 교전이 일어난 지 50일만에 장기 휴전에 합의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으로 이날까지 팔레스타인인 2천140명이 숨지고 1만1천명 넘게 다쳤습니다. 이 가운데 민간인은 75% 가량입니다. 유엔은 또 1만7천 채의 가옥이 파괴되고 집을 떠난 피란민만 1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측에서는 같은 기간 하마스의 로켓포 공격과 교전 등으로 민간인 5명과 군인 64명 등 69명이 숨졌습니다. 그러나 9월 16일 다시 하마스가 로켓포로 공격했다며 공습 시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랍이 팔레스타인을 정치적,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제대로 했다면 중동 지도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을 형식적으로 지원하면서 이스라엘에는 대규모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49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은 1천80억 달러로 추산됩니다. 미국 다음으로는 독일이 많은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독일의 원조는 주로 나치 만행에 대한 배상 형태로 이루어져 총액은 대략 310억 달러입니다. 이스라엘이 막강해지자 팔레스타인의 독립운동은 이슬람주의자들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아랍어로 하마스로 알려진 이슬람저항운동은 미국은 2008년을 중동 평화의 해로 정하고 평화의 불씨를 지피고 있으나 전망은 어둡습니다.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가, 한 권의 책이 개인과 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할 수 있습니다. 시대를 움직입니다. 하지만 각색되어 포장된 부분도 많습니다. 하여간 중요한 진실은 전쟁이나 교전, 분쟁을 해결하는 길은 서로의 문제점을 풀어가는 것보다 상대방을 우선 인정하는 게 지름길입니다.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서 가고, 멀리 가고 싶으면 함께 가라”는 말처럼 서로 용서를 하고 상대방을 인정하는 게 국가나 우리 사회, 가족간에 필요합니다.
질병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병을, 나의 상처를 우선 인정하고 의사 등 전문가의 의견에 순응하고 담담하게 치료하는 게 가장 좋은 해결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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