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비히 2세의 예술적 영혼을 만나다
독일 퓌센
독일 남부의 젖줄인 마인·타우버·레흐 강. 이 강을 따라 옛 독일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며 꿈과 낭만이 스며있는 동화 속의 도시, 로만티크 가도는 한동안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묶어 두기에 충분하다. 울창한 수풀을 지나다보면 느닷없이 고풍스런 고성(古城)이 나타나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시대로 온 것처럼 색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차창 밖으로 부서져 내리는 전원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지고, 알프스 산자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몇 줌의 바람은 도시생활로 찌든 삶의 영혼까지 맑게 한다. 마치 동화책에서나 한번쯤 본 듯한 이미지들의 결정체가 바로 로만티크 가도의 종점인 퓌센에 응축되어 있다.
유로화가 사용되기 전 50마르크 지폐에 새겨진 도시이자 체코 프라하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인상을 주는 뷔츠부르크를 출발해 ‘중세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로덴부르크와 딩켈스뷜을 거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자유정신이 르네상스식 건물 곳곳에서 묻어나는 아우크스부르크에 이르면 로만티크 가도 여행이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이미 거쳐 온 도시들은 어쩌면 로만티크 가도의 정수인 퓌센을 위해 잠시 들러리로 선 것인지도 모른다. 주위에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퓌센은 중세의 고성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움과 어두운 삶의 그림자를 짙게 남긴 채 사라져버린 루드비히 2세와 관련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인해 매년 수백만 명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루드비히 2세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州)의 왕인 막시밀리안 2세의 장남으로 뮌헨 님펜부르크 궁전에서 1845년 8월 25일에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 시·음악·미술 등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중 16살 되던 해인 1861년 2월 2일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하면서 그의 인생은 운명적으로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정치수업을 받던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마음 깊은 곳에 예술에 대한 이상향을 키운다. 3년 후 아버지가 죽자 18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지만 정치에 대한 관심보다 그의 가슴 속에는 예술에 대한 강한 열정이 가득 차 있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복잡한 현실을 외면하며 점점 더 깊은 예술세계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그너의 진한 음악 향기는 루드비히 2세의 맑은 영혼을 울렸지만 현실은 외부세계와 철저하게 단절돼 점차 그를 의문의 죽음으로 몰아넣는 계기가 된다. 침실에서 곤히 잠을 자던 어느 날 새벽, 알 수 없는 정적들에게 납치되어 슈탄베르크 호수에 있는 한 요양소에 강제로 연금을 당하고, 3일 후인 1886년 6월 13일 루드비히 2세는 호수에 빠진 채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다. 그의 나이 41세로 예술에 대한 꿈을 펼치지도 못한 채 흔적만 남겨두고 오페라 주인공처럼 영원히 은막의 세계로 사라진 것이다. 아름다운 동화의 고성들은 불운한 삶을 살다간 루드비히 2세의 흔적들이 곳곳에 배어있다. 우선 루드비히 2세가 유소년시절을 보냈던 호엔슈방가우 성은 12세기에 지어졌으나 나폴레옹 침입으로 파괴된 성을 그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가 6년(1832~1837)에 걸쳐 재건축한 것이다. 알프스(백조의 호수) 호를 바라보는 언덕 위에 네오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은 파란 하늘 아래 노랗게 물든 외벽이 너무나 아름답다. 성안으로 들어서면 중세의 전설로 내려오는 ‘바바리안 기사’와 영웅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고 각 방마다 동양미술품과 진귀한 예술품들로 장식되어 성의 겉모습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3층에 있는 루드비히 2세의 방안으로 들어서면 고귀하고 순박한 그의 향기와 숨결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진다. 특히 백조의 호수를 향해 난 작은 창문으로 햇살 몇 줌이 쏟아지면 성모 마리아가 어린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가 호수보다 더 맑고 깨끗하게 비친다. 따뜻하고 푸근한 엄마 품에 안겨있는 어린 예수는 마치 심약하고 감성적인 루드비히 2세의 모습을 닮은 것 같다. 작은 방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낡은 피아노를 통해 애절한 삶의 그림자를 감춘 그의 여리고 감성적인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주변의 정치적 상황이 점점 미묘하고 복잡하게 얽힐수록 루드비히 2세는 더욱더 현실을 외면하고 동화 속의 어린 왕자나 오페라 주인공처럼 이상향만 꿈꾸게 된다. 그래서 그는 1869년 노인슈반슈타인 성을 비롯해 1874년 그라스방 계곡에 린더호프 성, 1878년엔 침제 호수에 있는 헤렌침제 성 등을 짓는데 몰두한다. 그중 하늘보다 더 푸르고, 호수보다 더 맑게 살다간 루드비히 2세의 예술적 영혼의 결정체인 노인슈반슈타인 성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곳이다. 일명 ‘신(新)백조의 성’이라고 불리는 노인슈반슈타인 성은 루드비히 2세가 직접 설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고, 그것도 모자라 은행 대출을 받아 지었다고 한다. 당시 널리 사용된 보편적인 건축양식과 달리 오페라 무대배경처럼 아름답고, 환상적인 양식으로 꾸미기 위해 뮌헨 국립극장 무대작가의 도움을 받아 멋진 성을 짓게 된다. 이 성은 1869년 착공해 1896년에 3분의 2 정도 밖에 완성되지 않았지만 미국의 월트 디즈니가 디즈니랜드 안의 판타지 랜드를 건축할 때 이 성을 모델로 삼았을 정도로 외관이 아름답고 수려하다. 성의 외벽은 흰색과 베이지 색의 대리석을 사용해 중세의 우아한 멋을 한껏 풍기면서도 다소 가라않거나 가볍지 않기 위해 하얀 색으로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날씬하며 우아한 자태로 건축된 이 성의 지붕은 여러 개의 남청색 원추들이 푸른 하늘을 향해 솟아올라 예술성을 더하고 유럽풍 바탕에 아랍의 특이한 문양을 가미한듯한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나 꿈꿀 법한 신비한 모습이다.
루드비히 2세의 삶이 녹아 있는 성 내부로 들어가면 루드비히 2세가 얼마나 바그너의 오페라를 좋아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마치 바그너의 오페라 한편을 감상하기 위해 극장을 찾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벽에 걸린 모든 벽화와 그림들이 마치 오페라의 등장인물과 배경을 옮겨 놓은 것처럼 바그너의 음악세계가 살아서 숨 쉬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거실에는 오페라 ‘파르지팔’과 ‘로엔그린’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아름다운 회화로 그려져 있고, 창 한 귀퉁이에는 사촌누이인 소피 샤를로트가 선물한 백조 모양의 화병이 놓여있다. 또한 백조를 이미지화 해 방문 고리, 커튼, 벽화 등 내부 곳곳에 백조들의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거실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통로엔 오페라 ‘탄호이저’, 각 방들엔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등 성안을 여행할수록 더욱 루드비히 2세가 얼마나 바그너의 오페라를 좋아하고 사랑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노인슈반슈타인 성에서 루드비히 2세는 6개월도 채 살지 못했고, 정작 바그너는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내부를 관람하고 나면 로만티크 가도의 피날레를 왜 퓌센이 장식하는가에 대한 의문들이 풀릴 것이다. 동화 속의 도시 퓌센 그리고 루드비히 2세의 예술적 영혼이 눈과 귀 그리고 마음속으로 살며시 스며드는 기분으로 그 도시를 빠져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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