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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운주사를 만들었던 이들이 내려온건 아닌지"

제주한라병원 2012. 1. 30. 16:30

2011년/12월

[숨은 제주 알고 싶은 제주] 수정사터 석탑

“화순 운주사를 만들었던 이들이 내려온 건 아닌지”

 

 

역사는 흥미진진하다. 그 이유는 수많은 사실(事實) 가운데 ‘어느 게 사실(史實)일까’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우선 ‘그런 일’, 즉 사실(事實)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밝히는 게 중요하다. 사실이 아닌 숱한 이야기는 설화 속에 묻히기도, 전설에 흡입되기도 한다.


제주의 거대 사찰 가운데 하나였던 수정사도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에서 호흡의 곤란을 겪곤 한다. 언제 지어졌느냐에 대한 논란에서부터, 그렇게 큰 절이 어떻게 사라지는 비운을 겪었을까라는 다양한 추측들이 있다.


우선 조선왕조실록의 사실(事實)을 들여다본다.
“제주 목사에 따르면 비보사찰이 두 곳 있는데 수정사에는 현재 노비가 130명 있고, 법화사엔 280명이 있다고 합니다.(據濟州牧使呈 州境裨補二處 修正寺見有奴婢一百三十口 法華寺見有二百八十口)”<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1408년) 2월 28일>


비보사찰은 풍수지리설을 기초로 세운 절로, 당시엔 3000개가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억불숭유’를 내세운 조선 태종 땐 사찰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 등을 몰수하곤 했다. 그런 이유로 노비가 130명에 달하던 수정사는 30명으로 줄어들 게 된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수정사는 커다란 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말 이제현의 「익재난고(益齋亂藁)」에도 수정사가 등장한다. 「익재난고」엔 ‘수정사(水精寺)’-도근천요(都近川謠)라고도 불림-라는 제목의 노래가 실려 있다.

 

 

 

수정사터 석탑의 인왕상

 

도근천 제방이 터져(都近川頹制水坊)
수정사 안에 물이 출렁이네(水精寺裏亦滄浪)
승방에다 이 밤에 미인을 재우니(上房此夜藏仙子)
주지는 도리어 뱃사공이 되었네(社主還爲黃帽郎)

‘수정사’라는 노래를 읽어 내리면 내용은 다소 민망할 정도이지만 그 상황이 눈에 보일만하다. 이는 고려의 큰 절이던 수정사의 승려들이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를 알게 한다. 더욱이 고려의 대학자인 이제현의 문집에 포함될 정도였다면 이 노래의 위력은 물론, 수정사의 지위 또한 짐작하게 한다.


제주시가 지난 1998년 외도동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시행하면서 이 일대의 발굴을 진행한 결과 건물지 12동, 도로와 보도, 탑터, 석등터, 담장터, 기와 더미 등이 확인됐다. 유물 또한 많이 발굴됐다. 고려청자에서부터 조선조 백자류까지 골고루 출토됐다. 유구와 유물 등을 보면 큰 절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화려함은 오래가질 않았다. 점차 쇠락의 길을 걸어간다. 조선시대 억불숭유 정책의 영향이 미친 건 분명하지만 수정사가 왜 사라졌는지는 의문이다.

제주의 신당과 절을 불태운 인물로 우린 이형상을 지목하곤 한다. 하지만 수정사와 관련해서는 그는 ‘파괴자’라는 오명에서 자유롭다. 이형상에 앞서 제주목사를 지닌 이익태의 「지영록」에 수정사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연무정은 남문 밖 5리 광양에 있다. 허물어지는대로 방치돼 있다. 논의 결과 도근천의 폐사된 절의 재료를 실어다가 명월의 옛 가마터에서 기와를 굽게 했다”<지영록, 숙종 20년(1694년) 9월 27일>


수정사가 사라진 영문은 알 길이 없지만 이형상이 제주에 왔을 때는 사라지고 없음을 이익태의 「지영록」이 얘기하고 있다. 대신 수정사라는 절이 아닌 ‘수정(水精)’이라는 마을만 남게 된다.  「탐라순력도」를 들여다보면 ‘수정(水精)’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아쉬운 건 ‘왜 사라졌을까’에 대한 의문을 풀어줄 이들이 없다는 점이다. 사라진 건 사실이지만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한 사료(史料)가 없기 때문이다.


인왕상을 확대한 모습

 

수정사에 대해 풀리지 않는 의문은 또 있다. 수정사터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검은색 점판암 석탑 부재가 있다. 점판암은 제주에서 나지 않는 재질이다. 이 부재는 다층탑의 몸돌의 일부로 보인다. 가운데 부분엔 문(門)이 새겨져 있고, 그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이 좌우로 대칭되게 가는 선으로 표현을 했다. 연꽃을 밟고 있는 인왕은 주먹을 쥐고, 치켜든 한쪽 손엔 화염(火焰)이 표현돼 있다. 반대편의 인왕은 반쪽이 떨어져 나갔으나 남아 있는 인왕과 같은 형태이다.

 


 

수정사가 남긴 인왕상은 미술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를 통틀어 음각 솜씨가 보통이 아닌, 최고의 걸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하지만 누가 점판암에 인왕상을 새겼을까. 어쨌든 탑이 존재했고, 그 탑의 재질이 제주에서 나는 돌이 아니라는 점은 더욱 의문이다. 여기서 잠깐. 수정사는 언제 지어졌을까. 여기에 대해서도 이견이 분분하지만 원나라의 간섭을 받기 이전인 13세기 중엽이전에 지어졌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쯤에서 가설을 한 번 만들어보자. 역사에 가설은 있을 수 없지만 고려시대에 번창을 했고, 원의 지배를 받을 때 더욱 수정사의 기세가 등등했다는 점을 감안해본다. 문득 떠오르는 건 전남 화순에 있는 운주사다. 운주사는 천불천탑이라고 불릴 정도로, 불상과 탑이 널려 있다. 운주사 역시 수정사처럼 미스터리한 부분이 많다. 운주사는 고려가 몽골과의 항쟁을 한참 벌이던 13세기 중엽에 지어졌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거기에다 단기간에 수많은 탑을 세울 수 있었던 건 운주사 일대의 석재가 시루떡처럼 떼지는 점판암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가설이지만 수정사와 운주사가 조합되는 부분이 있다. 창건 시기와 석탑의 재질이다. 창건 시기는 13세기 중엽이고, 수정사에서 나온 인왕상의 재질이 점판암이라는 점은 이 가설을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운주사를 만들었던 이들이 제주에 내려와 수정사를 만드는데 관여를 한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