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한라병원

이명아명,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자신의 몸처럼 돌본다

병원매거진/제주의이야기

“용과 봉황무늬는 제주도민 아닌 지배자 몽골인의 것”

제주한라병원 2012. 1. 31. 09:32

2012년/1월

<숨은 제주 알고 싶은 제주> 법화사 터에서 나온 유물

“용과 봉황무늬는 제주도민이 아닌 지배자 몽골인의 것”

 

 

                                         법화사터에서 나온 유물들.

 

역사학자들은 고민이 많다. 그 고민은 ‘왜?’라는 의문을 늘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의 사실을 향해 외치는 ‘왜?’가 많아지면 그 사실은 사실과는 멀어지기 마련이다. ‘왜?’라는 고민은 그만큼 역사적 사실이 빈약할 경우에 사학자들이 던지는 의문에 다름없다. 서귀포시에 위치한 법화사도 그같은 ‘왜?’를 던진다.


법화사와 관련된 숱한 고민 가운데 2가지를 던져 본다. ‘왜 지어졌을까’와 ‘왜 명나라가 관심을 뒀을까’에 있다.


법화사는 ‘중창(重創)’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역사적 의미에서 ‘중창’은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경우를 말한다. 중창을 하게 되면 같은 모습 그대로 건축을 하기도 하지만 원래 모습과는 다르게 세워지기도 한다.


의문을 뿌리던 법화사는 제주대학교박물관이 지난 1992년부터 3~8차 발굴조사를 하면서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때 명문이 발견된다. 그 명문은 ‘지원 6년에 중창을 시작해 16년 기묘년에 끝냈다(至元六年己巳始重創十六年己卯畢)’였다. 3차 발굴조사에서는 ‘기묘년’에 중창을 끝냈다는 ‘重創十六年己卯畢’ 명문만 발견됐으나 7·8차 조사를 거치면서 ‘至元六年己巳始’라는 기와가 추가로 발견돼 중창의 시작연도를 알게 됐다. 지원(至元)은 쿠빌라이 칸(원나라 세조)의 연호로 지원6년이라면 1269년이 된다. 이 때 우리나라는 고려 원종 10년에 해당된다. 중창이 마무리되는 기묘년은 충렬왕 5년인 1279년이다.


당시 국제적 상황은 고려와 원나라 모두 도움이 필요한 때였다. 원종은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해 원나라의 도움이 절대적이었고, 원나라 역시 고려의 도움을 받아 일본을 제압하려는 의지가 강한 때였다. 1269년은 삼별초의 항쟁이 본격화되기 1년전이었다.


복잡한 국제적 정세 속에 끼어들어간 건 다름 아닌 제주도였다. 제주도는 삼별초의 항쟁이 마무리된 원종 14년(1273년)부터 원나라의 직할령이 된다. 법화사의 중창은 제주도가 원나라 직할령으로 되기 직전이지만 이미 제주도는 원나라의 영향력이 미쳤다고 봐야 한다. 바로 법화사 터에서 나온 유물이 말해준다. 숱한 의문 속에 법화사 발굴 결과 나온 유물이 던지는 시사점은 크다. 법화사 터에서 나온 대표적인 유물 가운데 눈에 띄는 건 용무늬 암막새와 봉황무늬 수막새다. 이들 막새는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사찰 건물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다. 북한의 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가 펴낸 「조선고고학개요」에 따르면 고려 도읍지인 개성 만월대에서 법화사의 막새와 비슷한 유형의 것들이 발견된 예가 있을 뿐이다. 이 유물은 또한 몽골의 콩두미궁전에서 발견된 막새와 같은 유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법화사엔 왜 용무늬 암막새와 봉황무늬 수막새를 썼을까. 몽골의 궁전과 고려의 왕궁인 만월대에만 나타나는 이들 막새가 법화사 터에서 나왔다는 점은 법화사가 존재 가치가 매우 귀했음을 읽히게 한다. 제주도는 몽골의 직할령으로 소중했고, 법화사는 사찰의 의미를 뛰어넘는 가치가 있다는 점을 용무늬 암막새와 봉황무늬 수막새가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100년간 지속된 몽골의 제주도 지배는 몽골 스스로도 제주도를 섬으로서의 가치가 아닌, 그 이상의 가치를 제주도에 부여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법화사는 제주민들의 것은 아니다. 제주에 들어온 몽골인들을 위한 것이었고, 몽골인들은 법화사에 그들 나라사람이 만든 아미타불3존상을 앉혔다. 그건 지배자의 역사였다.


그렇게 ‘잘 나가던’ 법화사였으나 고려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억불’을 외친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제주도내에 있는 절은 퇴화된다. 법화사는 노비를 280명을 거느릴 정도로 제주에서 가장 큰 절이었지만 쇠락의 길을 걷는다.

 

 

 

용무늬가 새겨진 암막새.

봉황무늬가 새겨진 수막새. 

 

그 와중에 명나라 사신이 찾아와 법화사에 앉혀진 아미타불3존을 가져가는 일이 발생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왜?’라는 의문이 발동할 수밖에 없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을 찾은 황엄이 황제의 칙서를 전한다. 당시 명나라 황제는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던 영락제(재위 1402∼1424년)였다. 명나라는 왜 불상을 가져갔을까.


“짐이 죽은 아비와 어미의 은덕을 생각해 제전을 열고자 한다. 특별히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인 황엄 등을 보내 그대 나라와 탐라에 가서 동불상을 구하려 한다. 잘 도와 성사시켜 짐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朕重惟先皇考皇妣恩德 欲擧薦揚之典 特遣司禮監太監黃儼等 往爾國及耽羅 求銅佛像數座 尙相成之 以副朕意)”<태종실록 11권, 태종 6년(1406년) 4월 19일>


명나라 사신은 칙서를 전한 다음날 태종이 베풀어준 연회에서 이렇게 덧붙인다.
“제주에 있는 법화사의 미타삼존은 원나라 때 뛰어난 장인이 만들었다. 우리가 가서 취하는 게 마땅하다.(濟州法華寺彌陀三尊 元朝時良工所鑄也 某等當徑往取之)”<태종실록 11권, 태종 6년(1406년) 4월 20일>


그러자 태종은 명나라가 동불상이 아닌, 제주도에 더욱 관심이 있다는 생각에 황엄 등 명나라의 사신이 제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다. 태종은 박모와 김도생 등을 시켜 법화사의 동불을 가져오게 만든다. 그 작전은 17일만에 이뤄지고, 이들은 재빨리 동불을 옮긴 공로로 관직을 받게 된다.


그런데 영락제는 진정 제주에 욕심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에 제주를 탐하려는 내용이 나와야 하는데 ‘동불상’을 가져오라는 것 밖에 없다. 때문에 제주도를 탐하려 했다는 건 억측일 수도 있다.


여기에 새로운 억측을 덧붙이면 영락제의 어머니가 고려인이었다는 추정이 있다. 그래서 그는 죽은 어머니를 위해 조선 땅에 있는 불상과 사리 등을 원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