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주건축가다] <8> 에이루트건축 이창규
제주의 마을과 가옥에는 거친 풍토 견뎌낸 제주인의 삶의 양식 녹아 있어
예전 할머니집에서 느꼈던 ‘기분 좋은 어두움’을 모티브로 어머니집 지어
건축가 이창규는... 에이루트건축은 부부 건축가의 공간이다. 제주 사람과 서울 사람이 만나 제주 건축을 말하고 있다. 사무소 이름에 들어간 ‘에이루트’는 음악코드인 ‘어 루트(a root)’에서 따왔다. ‘어 루트’는 음악에서 각 코드의 기본이 되는 근본 음이다. 음악코드로는 ‘어 루트’로 불리지만 그는 ‘에이루트(A root)’라고 말한다. 이때 에이(A)는 건축을 뜻하는 아키텍처(Architecture)라는 걸 알게 된다. 루트가 음악의 근원이듯, 건축의 근원도 그가 이뤄보겠다는 의지가 이름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구가도시건축 조정구 소장 밑에서 답사를 하며 건축의 실제를 알게 되었다. 그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은 건축가 정기용 선생이다. 모든 해법은 땅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정기용의 작품을 통해, 생각을 통해 배웠다. 그래서 건축은 서구적인 게 핵심이 아닌, 눈에 보이는 동네의 풍경을 담으려 한다. 제주시 원도심 지도를 그리는 이유도, 마을조사를 진행하며 사라지는 풍경을 기록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
- 건축과 지역성은 뗄 수 없는 문제이다. 제주의 지역성은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오래된 마을과 집은 옛것이고, 불편하고, 촌스럽기 때문에 세련되고 근사하게 바꾸어야 한다는 인식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제주의 마을과 가옥들을 찬찬히 보면 그 자리에서 오랜 시간 동안 거친 풍토를 견디고, 제주인의 삶의 양식이 녹아 있으며, 지금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학교에서 배운 혹은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는 제주 건축의 어휘들을 실제 답사나 연구를 통해 체득하고, 현대적으로 진화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제주 돌집의 진화, 제주 건축의 진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마을을 걷다 보면 혼자만 유별나고 튀려고 하는 건물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재료도 눈에 띄려 하고, 오브제(상징물)처럼 보이려 한다. 어떤 건 균형이 맞지 않다. 동네와도 어울리지 않는데, 그런 걸 볼 때 안타깝다.
예전 제주집은 풍광을 독점하여 짓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서로 풍경을 공유하고 조화로운 집과 마을을 형성할 수 있었다. 요즘은 자신의 집에서 자연경관을 최대한 많이 보고 싶어 한다. 경관을 독점하려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잘못됐다고 보지는 않는다. 제주를 해석하거나 제주에 내려와서 사는 분들의 다양한 욕구와 삶이 있기 때문에 그건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주변과 어떻게 균형을 맞추고, 어떻게 제주지역 풍토에 어울리게 할 것이냐에 있다. 이러한 자세를 가진다면 제주 건축이 조금씩 더 좋아지리라 생각한다.
- 에이루트건축은 어떤 건축을 추구하는지.
서울에서는 당연하고 쉬운 기법과 디테일들이 우리가 작업하는 제주에서는 풍토적인 이유로, 시공자의 기술적 한계로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자재를 구하거나 인력을 쓰는 것도 섬이라는 특성상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도 한다. 그래서 매번 작업을 진행할 때마다 기본을 다시 생각하고, 이 지역에 어울리는 디테일을 고민하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공간적인 힘과 아름다움이 유지되는 건축을 하려 노력 중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람의 이야기를 공간에 충실히 담는 것이다. 건축가의 생각과 창의로 공간이 구성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과 미감 등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만나 더 큰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고 본다.
- 서울에서 활동할 때의 이야기도 들어봤으면 한다.
대학생 때 서울 성북구 장수마을에 가보고, 공모전에 참가했다. 구가도시건축 입사 후 비영리단체와 마을활동가들이 모여 마을을 어떻게 바꿀지 제안하는 대안개발연구모임에 회사 담당 자로서 참여하게 되었다. 모임을 지속적으로 한 지 6년 정도 지난 후 장수마을이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하는 마을로 선정되었다. 그 마을은 한옥이 아닌 근대에 지어진 개인주택에 수선지원금을 주는 첫 사례였다. 보통은 한옥과 같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공공이 개인소유에 돈을 지원해서 건물을 보수하지 않는다. 조정구 소장님과 우리 팀은 한양 도성에 접한 근대 산업의 배후 마을로서 역사·문화·경관적 가치가 있다고 제안하여 성곽 주변으로 지구단위계획을 세워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장수마을을 시작으로 한양 도성에 접한 이화마을, 창신마을까지도 확장됐다.
장수마을을 하면서 6년 동안 주말마다 회의를 했다. 도시재생을 제대로 하려면 건축가가 차분하게 들여다보면서 필요한 게 무엇인지, 마을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고 진단하는 게 필수였다. 그런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 서울시는 장수마을 마을개선 프로젝트에 관심을 별로 갖지 않았다. 그럼에도 비영리단체인 ‘장수마을대안개발연구모임’을 5년간 가지면서 연구와 조사를 진행하고 주민들과 의견을 나누며 마을학교도 운영하는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모여 전방위적으로 마을 활동을 진행했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레 마을의 자료나 이야기가 축적되었고, 나중에 행정에서도 관심을 가졌고, 지구단위 용역까지 이르게 됐다.
- 원래 옛것에 관심을 뒀나?
제주도 건축가들은 대학교 때부터 지역성을 고민하고, 민가 건축을 본다. 졸업 후 조정구 소장 님을 만나면서 장수마을을 보고, 서울의 삶을 건축적으로 기록했다. 그러다 보니 제주도에서도 그런 조사를 해보고 싶었다. 제주에 내려와서 처음 한 작업은 ‘제주 어머니집’이다. 제주 출신이어서 제주적인 집을 설계해보고 싶었고, 그게 민가였다. 제주집은 누구나 다 아는 낮은 집이다. 민가를 보면 어두움이 있다. 예전 할머니집을 가면 기분 좋은 기억이 있다. ‘기분 좋은 어두움’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제주 어머니집’에 그런 표현을 했다. 2014년 당시만 하더라도 제주 건축은 풍경을 독점하고 건물을 도로보다 높게 지었다. 제주 개발 광풍일 때였지만 할머니집을 모티브로 나지막하고 어스름한 ‘제주 어머니집’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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