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20> 화북의 4·3
조카가 삼촌을 죽인 비극의 현장이 화북에 있다
지난달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비석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석거리에 서 있는 비석의 가치와 진실을 살짝 들여다본 글이었다. 사실 과거의 이야기를 찾아서 그 진실을 캐는 작업은 쉽지 않다. 역사적 사실을 알려면 기록을 근거로 하는데, 기록이 남지 않는 역사적 사실도 많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록은 오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기록이 전부 100% 맞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역사가들의 역할이 무척 중요하다.
그렇다면 기록이 아닌 역사는 어떻게 판단을 해야 할까. 흔히 말하는 구술(口述)이 있다. 구술은 입으로 전하는 기록이다. 역사학계는 구술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곤 하지만 구술도 역사를 밝히려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무척 중요하다. 특히 현대사는 더더욱 구술에 의존한다. 대표적인 현대 역사로 제주4·3이 있다. 제주4·3은 화북동에서 큰 상처를 남겼다.
제주4.3은 제주도내 어느 지역을 특정지어서 얘기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워낙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수만명에 이른다. 화북도 그런 마을의 하나였다.
1948년 4월 3일 0시를 기해 한라산과 오름에 봉화가 켜지는 것을 신호로 무장대의 공격이 시작된다. 당시 화북지서가 제주도내에서는 가장 먼저 습격을 당했다고 한다. 화북지서로 사용되던 공회당은 불타고, 지서에 근무하던 순경이 피살된다. 화북에 사는 어른들이 전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그날 새벽 2시 총소리에 잠을 깨 나와 보니 공회당이 불타고 있었다고 한다. 공회당은 화북 바닷가에 있던 건물이다.
△ 제주4·3 당시 공회당이 있던 곳.
화북은 제주4·3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화북지서가 불탔고, 특히 무장대의 마지막 사령관이던 이덕구 가족들이 화북에 있는 별도봉 기슭에서 처형됐다. 이덕구도 화북지서와 화북민보단 합동작전으로 사살됐다고 화북 어른들이 이야기를 전해준다. 아울러 초대 사령관인 김달삼은 화북포구를 통해 월북했다는 소문이 있다.
4월 3일 이후 5월 10일 총선거가 열리는데, 대대적인 거부운동이 화북에서도 일어난다. 그러다 무장대와 접촉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걸 보여주는 사건도 발생한다. 초가을 어느 날이었다. 경찰이 마을 사람들을 다 모이라고 한다. 학생들도 집합시켜 어디론가 데리고 간다. 화북 비석거리 남쪽에서 무장대를 사형시키는 장면을 주민들과 학생에게 보여준 날이라고 화북 어르신들은 얘기를 전하고 있다. 아들이 무장대가 돼 산에 갔다는 이유로 부부를 차례로 죽이는 일도 일어났다.
한마디로 하루하루가 공포였다. 더 큰 사건은 1949년 1월 8일 토요일에 일어났다. 낮 1~2시경에 비상 종소리가 울리고 화북초등학교 운동장에 마을 사람들이 모인다. 무장대와 내통했다며 80여명을 일일이 호명하고, 젊은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겁박했다. 삼촌과 조카가 순식간에 사형집행자가 되고 사형수가 되는 그런 일이 벌어졌다. 총구를 들이대니 경찰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전해지는 얘기로는 화북지서 주임이 떠나기 며칠전 성과를 내기 위해 화북사람들에게 요시찰 명부를 작성해오라고 하고, 그걸 실행해 옮긴 거라며 화북사람들이 얘기를 해오고 있다. 그런 참혹한 일이 발생하자 무장대도 가만 있지 않았다. 무장대는 화북 사람들을 무참히 죽인 그 장소인 화북초등학교를 불태운다. 1월 8일 사흘 후인 1월 11일 그 일이 벌어졌다.
1월 8일로만 끝난 건 아니었다. 이후에도 그런 일은 자주 발생했다. 별도봉 남쪽은 매일 총성이 울려 사형장이 됐다고 한다. 사형장에서 다행히 살아난 사람도 있었다. 화북의 동마을 사람 한 분은 경찰에 붙들려 사형장으로 끌려갔는데, 다행히 총을 맞지 않고 살아났다고 한다. 밤에 집으로 돌아와 숨어 지냈고, 3~4년 그런 생활을 했다고 한다.
곤을마을 사건은 1949년 1월 4일 발생한다. 토벌대가 무장대와 교전을 하게 되는데 교전을 벌이던 무장대들이 곤을마을 방면으로 도망가는 걸 보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곤을마을을 폭도마을이라고 몰아붙여서 이 마을을 완전 사라지게 만들었다.
4·3 때 해안마을은 무장대 습격에 대비해서 성을 쌓는다. 화북도 마찬가지였다. 동마을 끝에서 지금의 화북교회 인근을 거쳐 서마을로 이어졌다. 출입구도 세 곳에 내는데 동문, 남문, 서문, 이렇게 3곳에 입구가 만들어졌다. 지금도 화북엔 남문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버스정류장 명칭도 화북남문이다. 즐겨 불리는 버스정류장에 4·3의 기억이 온전히 붙어 있다. 버스정류장은 과연 그 사실을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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