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17> 제주시 봉개동 동회천
조선 들어서자 ‘불사이군’ 외쳤다는 이야기가 있다네
마을은 사라지기도 한다. 대개는 힘이 센 이들의 강압에 따른 경우이다. 아니면 대규모 자연재해로 세상과의 결별을 고하는 마을도 있다. 이번에 찾을 마을은 제주시 봉개동에 있는 동회천이다. 사라질 위기였으나 재건된 경우에 해당한다. 바로 4·3 때문이다.
예전엔 회천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 새가름, 드르생이, 새미, ᄀᆞ는새 등 4개 마을을 합쳐서 회천이라고 했다. 그러나 4·3 때 소개령으로 이들 마을 사람은 모두 떠나야 했고, 4개 마을 가운데 새미와 ᄀᆞ는새 등 2개 마을만 재건된다.
동회천이라고 불리는 마을은 오랜 역사를 지녔다. 이 마을에서 신석기 때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다. 도련으로 향하는 도로가 개설될 때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면서 유적이 드러났다. 동회천이 실제 역사에 등장하는 건 ‘천미(泉味)’라는 말에서 찾게 된다. 340년 전의 지도에 그런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에 마을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기록이 모든 걸 말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도 무시를 하진 못한다. 동회천과 연관이 있는 전설을 듣다 보면 더 오랜 시기에 마을이 존재했음을 유추하게 만든다. 신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된 지역이기에 사람들이 사는 환경은 충분히 조성됐다고 봐야 한다.
동회천 이야기를 하려면 ‘숲’도 들여다봐야 한다. 바로 ‘역적수월’이라고 불리는 숲이다. 역적수월은 화천사 뒤에 있는 숲을 말한다. 7000평은 됨직한 널따란 숲은 다름 아닌 곶자왈이다. ‘역적수월’에서 ‘수월’은 숲이라는 제주어다. 그런데 수월 앞에 ‘역적’이 붙어 있다. 역적은 반역을 저지른 사람이라는 뜻인데, 왜 그런 단어가 붙었을까.
◇ 역적수월(새미숲)
역적수월은 원래는 새미수월로 불렸다고 한다. 고려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오면서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는 ‘불사이군’을 외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동서로 오고가는 진상품을 빼앗곤 했다고 한다. 그 본부가 새미수월이었고, 조선의 입장에서는 역적이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조선이 아닌 고려 입장에서 보면 충신이었고, 조선에 바치는 조공을 약탈한 셈이 된다. 그런 연유를 따지면 동회천의 역사는 600년까지 올라간다.
동회천과 ‘불사이군’. 여기엔 현황두라는 인물이 있다. 현황두는 자신이 살던 동회천을 중심으로 조선에 반역을 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새미수월을 중심으로 삼아 성을 쌓았다고 전한다. 지금은 성의 흔적은 없지만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성담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성이 있었다는 곳 주변에서 조선 초기의 자기도 출토됐다고 전한다.
아쉽게도 역적수월과 현황두.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료로 남아있지 않다. 다만 이야기로 내려올 뿐이다. 역사로서 입증되려면 사료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빈약하다는 게 아쉽다.
동회천에 있는 절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화천사에 있는 다섯 개의 돌불상 이야기를 해야겠다. 돌불상이 다섯 개여서 ‘오석불’로 불리는데, 동회천 사람들은 여기서 마을제를 지낸다. 마을제는 원래 유교식이다. 매년 한차례 치르는 마을제에 빠질 수 없는 게 육고기이다. 석불제엔 육고기를 올리지 않는 걸 보니 불교식 색채도 있는 모양이다. 또한 석불제라는 마을제와 함께 아주 큰 당제가 열린다. 하로산당이라는 당제로, 1년에 두 번 만나게 된다.
요즘 제주도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찾는 섬이 됐다. 마을마다 공사장이다. 집도 많이 들어선다. 동회천에도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예전 마을사람들의 힘으로 회천분교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한때 학생수가 100명을 넘었다고 한다. 학교가 새로 만들어지기를 기대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됐다.
동회천 마을이 특이한 건 마을발전소를 통해 전기를 공급받고 있다. 집집마다 태양광 시설을 들여놓았고, 회천쓰레기매립장 보상금으로 운영해오고 있다. 덕분에 전기세 걱정은 없단다. 동회천은 또 마을회관에 사무장을 두는 몇 안 되는 곳이다. 사무장을 두려면 급여를 줘야 한다. 바로 발전소 운영으로 얻은 수익금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동회천엔 한 가지 더 신기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쌍둥이 골목’이다. 그 골목은 여덟 집이 쌍둥이라고 한다.
◇ 새미하로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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