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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은 누추하고 비좁아 쉬기에 마땅하지 않다”

제주한라병원 2017. 11. 27. 14:59

숨은 제주, 알고 싶은 제주 탐라순력도 이야기 <34> 초가

 

“객관은 누추하고 비좁아 쉬기에 마땅하지 않다”

         

 

흔히 얘기한다. 초가삼간이라고. 1970년대 불린 노래가 있다. 홍세민이 부른 ‘흙에 살리라’이다. 중장년들이라면 이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을게다. 노래는 초가삼간으로 시작한다. 노랫말 1절만 옮긴다면 “초가삼간 집을 지은 내 고향 정든 땅/아기염소 벗을 삼아 논밭 길을 가노라면/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것을/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나는야 흙에 살리라 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흙에 살리라”

입 안에서 가슴에서 노랫말이 맴돈다. ‘흙에 살리라’는 노래 한 곡으로 가수라는 직업을 살아온 홍세민을 여기서 강조하려는 건 아니다. <탐라순력도>에 비친 초가삼간은 어땠을까라는 걸 이야기해볼까 한다.


<탐라순력도>는 제주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그러니까 품계로는 종3품에 해당한다. 제주목사는 또한 그냥 종3품도 아니다. 전라도에 속해 있으나 관찰사의 통제를 벗어난 곳으로, 제주목사가 제주도에서는 관찰사의 역할을 대행했다. 그만큼 위세를 가지고 있던 이가 제주목사였다.


그런 위세를 지닌 이가 명령을 내려서 그린 그림이 <탐라순력도>였다. 그림을 그린 화공 김남길은 <탐라순력도> 서문에만 잠깐 등장할 뿐, <탐라순력도>는 온전히 이형상을 위한 그림이다. 그래서 <탐라순력도>의 초점은 이형상에 맞춰져 있다. 이형상은 그림에 붉은 두건을 쓰고 순력을 하고 있다. 쉽게 찾을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초가삼간은 <탐라순력도>에 어떻게 나올까. 아니 어떤 게 초가이고, 어떤 게 기와를 얹은 와가였을까. 답을 하자면 대부분은 초가였다. 초가삼간에 해당하지 않는 건물도 초가인 경우가 많다. 큰 건물도 초가인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탐라순력도>를 그린 김남길은 초가와 와가를 확실하게 구분을 해서 그림으로 남겨뒀다. 지붕만 보면 알 수 있다. 기와가 얹혀 있는지를, 그렇지 않은 건물의 지붕은 어떤지를 보면 된다. 기와를 얹지 않은 건물인 경우 노란색 계통의 색을 칠해, 초가였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아무래도 와가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제주성내이다. 관덕정을 중심으로 남북은 대부분 와가가 배치돼 있다. 현재 문화재로 복원된 목관아 일대는 죄다 기와 지붕이다. 그런데 민가는 죄다 초가였다. 성내에 있는 민가들도 초가인 것은 물론, 성밖에 있는 건물은 당연했다.


조선시대 제주도는 제주읍, 정의현, 대정현 3읍 체제였다. 3읍의 성내 건물은 그나마 와가 비율이 높지만 진성인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9개 진성 가운데 4개 진성의 건물은 모두 초가였다. 초가 비율이 100%였던 진성은 애월진, 차귀진, 모슬진, 수산진 등 4곳이다. 서귀진인 경우 1개 건물을 제외하면 다 초가였다. 이렇게 보면 9개 진성의 절반이 초가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지붕 비율로 초가가 높다는 건 우선 재료적 측면을 봐야한다. 제주도는 기와를 생산할 시설이 육지부에 비해 뒤졌다. 제주 관아에 있던 홍화각을 중창할 때 김진명이 쓴 ‘홍화각중수기’를 들여다보면 기와를 굽는 이들을 육지에서 데려왔다고 돼 있다. 이때가 효종 원년인 1649년이다. 기와를 제주에서 만들지 못해서 기술자들을 데려올 정도였는지, 아니면 가마가 부족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제주에서 기와를 넉넉하게 만들 형편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형상 목사도 제주목사라는 직을 떠난 후에 펴낸 <남환박물>이라는 책에서 “질그릇을 구워내는 게 심히 적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만큼 옹기류의 생산이 적었다는 표현이다. 따라서 기와를 생산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이형상은 순력을 다니면서도 그리 편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순력은 봄과 가을에 의무적으로 하는 행사였고, <탐라순력도>에 담긴 내용은 1702년 가을의 모습이다. 이때의 모습을 이형상은 “두 현(정의현·대정현)과 9진에 모두 객관이 있다. 그러나 누추하고 비좁아 쉬기에 마땅하지 않다”고 표현했다. 객관이라면 벼슬아치들이 이동할 때 묵는 숙박시설을 말한다. 당시 객관 혹은 객사 건물 대부분은 초가지붕을 얹혔는데, 이형상은 뭐가 그리 불만이 많은지 모르겠다.


와가와 초가의 구분은 지붕의 재료에 있긴 하지만 구조를 따질 경우 와가가 훨씬 복잡해진다. 초가인 경우 부재를 흔들림없이 끼워 맞추면 되지만, 와가는 좀 더 세밀한 조합이 필요하다. 기둥 틀 위에 가지런히 부재를 얹히고 기와를 올려야 하기에 빈틈이 허용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손이 더 가는 게 와가인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초가가 못난 건 아니다. 살기 불편한 것도 아니다. 제주에 가장 최적화된 게 초가인데, 양반으로만 살아온 이형상에겐 와가가 아닌, 초가에서 며칠 묵는 것도 불편 중의 불편이었던 모양이다.

    



 ‘서귀조점’의 진성 부분이다. 그림 속에서는 군사창고가 유일한 기와 건물이며, 나머지는 전부 초가이다. 이형상 목사(원내)가 초가에 앉아 집무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