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생활흔적과 산악인들의 추억이 서려 있는 곳
서귀포시 하원동 하원수로길
어느 날부터 여기저기 수많은 길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 곳의 특색을 나타내는 길….
크고 작은 예산들을 받아 산을 정비하고 마을길을 다져서 만드는 길이 조금은 지나치게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옛것을 후손들에게 보여주고 물려주려는 노력도 여기저기서 엿볼 수 있다. 지난 추억과 조상들의 삶을 담아 길의 테마를 만들어 제주의 아름다움을 더욱 맛깔나게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 중에 나는 서귀포 자연휴양림을 지나 법정사 입구에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하원수로길’을 추천하고 싶다.
한라산의 나무들이 푸른 숲을 만들 준비를 하는 이맘때 고사리 장마를 알리듯 잦은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졸졸졸 산에서 내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산행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하원수로길’이다. 이런 길이 있었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처음 듣는 사람들도 있을 법한 이곳은 서귀포 하원동 사람들이 1950년 후반 전쟁의 후유증으로 빈곤를 이겨내기 위해 논농사를 계획하고 물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실물과 언물을 하원저수지까지 끌어오기 위해 조성한 수로이다. 수로가 조성되기 이전부터 한라산등반로가 개설되기까지 한라산 등반로 구실을 했었다고 한다. 옛 조상의 생활의 흔적뿐만 아니라 먼저 걸어간 산악인들의 추억도 서려있는 곳이리라. 그러나 수로는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해 논농사는 계획과는 달리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오늘날 남아 있는 이끼에 덮인 수로길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길이 시작되는 무장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무오법정사지는 한라산둘레길인 ‘동백길’과 ‘하원수로길’의 기점이 되고, 존자암으로의 ‘절로 가는 길’의 통과점이 된다. 하원수로길은 영실매표소위 1km지점까지 자연림속에 남겨진 수로를 따라 4.2km 걸어 다시 되돌아오는 길이다.
한라산둘레길이라는 둥근 아치를 통과하면 오른쪽으로 깊게 들어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등산로에는 마지막 남은 붉은 동백꽃이 활짝 피어 길을 안내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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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족두리풀 | 꽝꽝나무 | 머위 |
조릿대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가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시멘트 수로를 만난다. 좁은 수로 위를 걷다보면 순간 아슬아슬 계곡을 가로 지르고 있다. 수로 아래쪽으로 계곡을 통과하는 길이 있지만 아주 옛날 줄타기를 하던 광대처럼 균형 잡으며 걷는 느낌도 나쁘지 않다. 숲은 아직 이른 봄이라 나무들이 초록 잎을 살짝 내보이고 있어 초록의 싱그러움은 덜하지만 발아래 작은 생명들이 발길을 더디게 한다. 먼저 낮은 지대에서는 볼 수없는 ‘노란제비꽃’ 전문과들도 구별이 잘 안 가는 수많은 보라색 제비꽃이 색색이 피어서 썰렁한 듯한 등산길을 즐겁게 해준다.
예전에는 제비꽃이 피면 봄이 시작되었다고 했지만 언제부터인지 겨울날 따뜻한 양지바른 곳에서도 보라색 제비꽃을 자주 보게 된다. 추운날 예쁜 꽃을 만나 반갑지만 자꾸만 구별하기 힘든 계절과 날씨변화에 생태환경이 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넓은 우산을 쓰고 있는 듯한 ‘개족두리풀’이 짙은 보라색 족두리꽃을 수줍은 새색시처럼 잎 아래에서 피우고 있다. 등산로 길 가득 덮고 있는 도토리를 밟고 걷다보면 도토리꼭지에서 새싹이 나와 땅속으로 파고드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스럽다. 아기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찍어 놓은 듯한 ‘쇠별꽃’ 이름이 특이해서 다시 보게 되는 ‘옥녀꽃대’ 숙순처럼 올라오는 맹독성의 ‘천남성’ 새순이 여기저기 올라오고 있다.
불에 태우면 ‘꽝꽝’소리가 난다는 꽝꽝나무와 사이좋게 이웃한 ‘굴거리나무’는 기온이 떨어지면 큰 잎을 아래로 모아 자기 체온을 지킨다고 하는데 그 모습이 토끼가 큰 귀를 아래로 감싸고 있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지만 은근히 귀엽다. ‘사스레피나무’ ‘서어나무’ ‘졸참나무’ ‘단풍나무’ 등 이 곳 역시 숲의 안정된 ‘극상림’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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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제비꽃 | 노란제비꽃 | 제비꽃 |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길이라 힘들지 않은 듯하면서 등과 이마에 땀이 흐를 때 쯤 ‘언물’(암석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차가운 물) 쉼터를 만나 목 한번 적시고 다시 얼마 지나 않아 갈림길이 나오는데 직진해서 올라가면 영실로 올라가게 되고 오른쪽으로 제법 넓은 길을 따라 가면 옛날 표고버섯 농장을 했던 건물이 나오게 된다. 지금은 폐허로 흉물이 되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데 빠른 시일에 철거가 되었으면 한다.
길을 돌아 다시 오던 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올라가면서 봤던 수로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렵게 산길을 따라 물길을 만들어 허기진 배를 하얀 쌀밥으로 채워보리라 생각했을텐데 그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 흔적만 남기게 된 안타까운 생각에 이끼로 덮인 수로를 보며 발길을 멈추어 잠시 숙연해지기도 한다. 척박한 환경에 무한한 노력으로 살아남은 우리 조상들의 인내와 끈기는 오늘날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는 우리들을 돌아보게 한다. 이런 인내와 끈기는 우리 조상들만이 아니라 이렇게 오래된 숲을 지키며 괴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나무와 돌에서도 배우게 된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에 찾았을 때도 좋았지만 이렇게 새싹들이 숲을 만들기 시작하는 요즘 봄비가 내려 물소리를 들으면 걷는 ‘하원수로길’은 메마른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셔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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