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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도시에서 문화․예술의 도시로 성장

제주한라병원 2014. 11. 25. 14:41

무역도시에서 문화․예술의 도시로 성장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네덜란드하면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풍차이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 도시의 상징은 단연 풍차이다.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와 ‘태양의 화가’ 반 고흐를 문화적 아이콘으로 삼은 암스테르담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함께 ‘물의 도시’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도시다. 우리에게는 암스테르담이 성으로 개방되고 자유와 낭만이 넘쳐나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1602년 동인도 회사를 통해 향신료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 도시는 유럽 각지에서 몰려든 상인들로 인해 거리는 언제나 활기가 넘쳐난다. 하지만 과거의 이곳은 수백 년 동안 바다로부터 많은 위협을 받았다. 한 프랑스 여행자는 “암스테르담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다”라고 했을 만큼 도시의 자연적 조건이 형편없다. 높은 조수가 밀려오면 도시가 바다에 잠겨 남자들은 밭을 가는 시간보다 제방을 쌓고 고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시민들의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바탕으로 제방을 쌓고 관리를 통해 이제는 유럽에서 가장 번성한 무역도시이자 금융도시로 성장하였다. 그 당시 지어졌던 부두, 창고, 상점, 작업장 등은 세월의 뒤안길로 살아졌지만 아직도 도시 곳곳에는 200~300년 전 무역을 관장하던 길드의 힘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중세풍의 건축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도시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유럽의 관문으로 통하는 암스테르담은 인구 100만 명의 대도시다. 이곳에는 시립대학, 자유대학(개신교 재단), 왕립 네덜란드 과학 아카데미, 음악 학교 등을 비롯한 다수의 교육기관과 40개가 넘는 박물관이 도시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특히 암스테르담은 ‘물의 도시’라는 별칭답게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운하와 암스텔 강이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한다.

 

 

암스테르담은 반 고흐만큼 유명한 바로크의 거장 렘브란트가 예술적인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중앙역에서 구시가지로 접어들면 고풍스런 집들이 부채꼴 모양으로 들어서 있고, 도시는 수면보다 18m 낮아 모래를 다져넣은 인공구조물 위에 서 있다. 단단한 인공구조물에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건축된 6,750여 개의 유서 깊은 집들이 렘브란트와 반 고흐가 살았던 시대를 연출한다. 깊이 2m쯤 되는 160여 개의 운하에는 수천 개의 주거용 보트가 떠 있고, 운하를 따라 여행자들을 태운 작은 보트들이 쉴 새 없이 강물처럼 흘러간다. 90여 개의 섬을 연결한 1281개의 다리는 암스테르담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매력이다. 자연을 상대로 인간의 지혜와 삶의 강인함을 보여준 운하개발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수많은 사람들로 활기가 넘쳐나는 담 거리의 오후 풍경.


 

중세의 귀족적인 분위기와 렘브란트의 강한 빛이 조화를 이룬 암스테르담에 발을 내디디면 눈과 마음속에 자연의 미학과 인간의 행복이 빛을 따라 살포시 다가선다. 여행의 중심지인 담락(Damrak)거리에 들어서면 자신도 모르게 중세시대 시민이 된 것처럼 우아함과 세련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구시가지로 이어진 담락거리는 높은 빌딩보다 16~18세기에 지어진 중세건축물과 더딘 시계바늘처럼 느린 전차가 거미줄처럼 얽힌 도시를 꿈틀대며 달린다. 도로를 따라 거리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노천카페에 앉아 시원한 맥주 한 잔과 톡 쏘는 청량음료를 마시며 따스한 햇살을 즐긴다. 물결이 거의 일렁이지 않는 운하에는 작은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달리고, 운하 옆으로 들어선 수양버들에선 아주 싱싱한 새싹이 솟아나 봄의 향연을 만끽한다. 쉴 새 없이 흐르는 운하처럼 담락거리와 구시가지 거리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발길이 닿는 데로 흐르다보면 담락거리가 끝날 즈음 17세기 황금시대의 영화(榮華)와 예술의 진면목이 느껴지는 왕궁과 담(Dam) 광장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과거 암스테르담 시청사로 쓰였던 왕궁은 현재 네덜란드 여왕이 이곳에 들를 때마다 기거하는 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암스테르담의 중심인 담 광장에 자리한 왕궁은 이 도시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1648년 1월, 로마건축에서 영감을 받은 건축가 야콥 반 캄펜은 물이 괴는 낮은 땅에 1만 3659개의 말뚝을 박는 것으로 왕궁을 짓기 시작했다. 외관은 엄격한 고전양식을 따랐으며 내부에는 호화로운 가구들로 채웠다. 각 방은 화려한 양각과 플랑드르 풍의 대리석 조각들로 장식했으며, 방을 두른 장식의 띠와 천정화는 렘브란트의 제자인 페르디난드 볼과 고버트 프링크가 그렸다. 그러나 이 건물을 설계한 반 캄펜은 왕궁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그 뒤를 이은 스타페르트가 공사를 마무리했다.  17세기 네덜란드 고전주의 양식의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이 건물은 약 200년간 암스테르담 뿐 아니라 네덜란드의 정치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왕궁의 화려함 이외에도 이 도시는 문화․예술을 자랑하는 반 고흐미술관과 렘브란트의 영혼을 만날 수 있는 국립미술관과 렘브란트 아틀리에가 여행자들의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사실 암스테르담 여행은 중세시대 때 지어진 왕궁이나 운하와 수천 개 다리가 빚은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아니라, 암스테르담의 문화적 상징 아이콘인 반 고흐와 렘브란트의 예술적 영혼을 만나는 것이다. 물론 20세기에 암스테르담은 맥주, 다이아몬드, 꽃 등이 여행의 대표적인 요소들이었다면 지금은 문화․예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문화 아이콘은 단연 화가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렘브란트와 반 고흐가 바로 암스테르담을 대표하는 예술가이다. 현재 이 도시에는 그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물론 반 고흐는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생가나 그의 무덤을 볼 수 없지만, 시내에는 반 고흐 미술관이 있어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예술세계와 소통할 수 있다. 반대로 렘브란트는 일평생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가 머물며 작업했던 아틀리에와 그의 주옥같은 작품이 전시된 국립미술관 등에서 렘브란트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전차가 도시 한 가운데를 가로지를 만큼 고풍스런 분위기가 연출되는 암스테르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