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건축물 복원은 현재의 기억을 없애는 일
제주 건축 따라가기(2)
▲ 옛 제주극장
제주시 원도심을 둘러볼까 한다. 제주시 원도심은 제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이 곳엔 탐라에서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친 역사성을 지녔다.
그래서일까 제주시 원도심은 ‘당신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라고 묻는 곳이 아닐까. 이는 제주에서 나고 자란 이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원래의 제주는 어디부터라고 말을 해야 하나. 원래의 먼 제주라고 부를 옛날의 탐라는 이곳엔 없다. 고려도 없다. 지금 눈에 보이는 건 조선 뿐이다. 사실 조선은 탐라와는 별개이다. 탐라라는 정치체제를 어르고 달래기 위한 게 바로 조선의 제주목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의 눈에는 관덕정만 눈에 들게 됐다.
여기에서 잠깐, 건축물 복원 문제를 언급하고자 한다. 건축물 복원은 대개 어떤 정치세력의 상징성을 과시하기 위해 이뤄지곤 한다. 멀게는 조선조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일이나, 가깝게는 김영삼 대통령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경복궁을 다시 올린 작업들이 그렇다.
제주에서도 그런 작업은 흔하다. 목관아지라고 불리던 곳에 복원사업을 벌이며 조선 당시의 건축물을 하나 둘 세워뒀다. 이젠 터였던 ‘목관아지’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목관아’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런데 복원의 문제는 기억의 파괴라는 또다른 단면을 지니고 있는 걸 많은 사람들은 망각을 한다. 바로 목관아를 만들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기억 속의 건축물들이 사라졌다. 4·3의 흔적 등 제주사람이라면 잊어서 안 되는 그런 사건의 현장은 조선시대 건물을 복원한다는 미명하에 사라지고 없다. 우리의 기억 속에 온전히 남아 있는 4·3을 비롯한 기억들이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기억에는 아예 없고 역사의 사료로 몇 줄 남아 있는 기억이 중요할까.
제주시 원도심은 기억의 집합체
제주시 원도심은 기억이 층층이 겹친 곳이다. 그런 기억이 층층이 겹친 곳에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과거의 기억을 억지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기억은 당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기억일 때라야 그 빛이 난다. 파괴되고 나면 기억조차 사라지기 때문이다. 유럽의 도시들은 기억을 가지면서 성장한다. 그래서 기억들이 층층이 겹친다기보다는 과거 죽은 자의 기억과 지금이라는 현재를 살고 있는 이들간의 기억이 맞아떨어지곤 한다.
제주시 원도심의 기억은 조선시대를 살던 이들과 현재를 살던 이들과 별개인 것이다. 그들간의 기억은 서로 다르다. 그러기에 현재의 기억을 지닌-사실 현재를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이 제주시 원도심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다-이들의 삶에 초점을 두고 복원이 이뤄져야 한다. 그것의 전제조건은 바로 ‘도심 재생’이다.
원도심은 층층이 쌓인 기억들이 있지만 지금 우리들의 눈에는 과거의 것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광복 직전 만들어진 건물로 옛 제주극장(건축가 및 건축연도 미상) 등 몇몇 건물을 만나게 된다. 제주극장은 콘크리트로 올린 건물이며, 지붕은 목재를 얽어 만든 트러스 구조이다. 1980년 폐업한 이곳은 4·3 때 ‘조일구락부’로 쓰이곤 했다. 서북청년단이 활동하면서 무고한 제주사람을 탄압했던 아픔의 장소였다.
제주극장은 당시의 건물로는 규모가 있는 건축물이었다. 이 건물 1층은 매표를 했던 곳이 그대로 있으며, 2층은 당시 영화관이었음을 보여주는 스피커도 남아 있다.
전형적인 일본 건축물을 보여주는 제주시청사
현재 제주시청사(옛 제주도청사, 1952년 건축, 주명록 설계)는 등록문화재 155호이다. 이 건축물은 과거 일제강점기 때 관청건물의 전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그건 바로 좌우대칭에다, 건물중앙부에 돌출부를 두고 대칭성과 중심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후 증축을 하면서 좌우대칭이던 건물의 틀은 깨진다.
학자들은 이 건물을 향해 새로운 형태의 것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등록문화재로 포장을 하려다보니 그리 된 것일 뿐이다.
제주시청사가 일제강점기의 건축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의 하나로 건축물을 설계한 이에서 찾을 수 있다. 주명록은 전남도청 공무원으로, 아마도 일제강점기 때 건축을 배웠다. 그런데 일제 당시 조선인들이 배운 건축은 설계엔 초점을 두지 않을 때이다.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는 르 꼬르뷔지에 제자들이 활동을 하며 건축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때의 우리나라 건축이란 집을 어떻게 생각하며 지을지에 대한 ‘건축’적인 관심보다는 일제에 충성을 다하는 인간들의 집합소를 만드는 ‘건설’이라는 사고방식이 더 앞선 때였다.
제주시청사를 시행한 곳의 이야기를 알아두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제주시청사는 중앙산업이라는 곳이 시행한 건물이다. 중앙산업은 1957년 우리나라에서는 첫 단지형 아파트를 만든 건설회사였고, 국내 건설사 수주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렇게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주시청사 낙성식 자리에서 중앙산업 조성철 사장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면서부터이다. 중앙산업은 이승만 정권의 유지를 위해 선거자금을 댄 대표적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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