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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맞선 지혜와 여인과의 사랑을 담은 '한국판 오딧세이'

제주한라병원 2011. 11. 10. 14:14

2011년 / 8월

 

숨은 제주 알고 싶은 제주 - 장한철의 「표해록」

바다에 맞선 지혜와 여인과의 사랑을 담은 '한국판 오딧세이'

 

조선시대엔 제주사람들의 육지부 출입이 제한됐다. 바로 '출륙금지령'이다. 그래도 예외를 적용받는 이들이 있었다. 과거에 응시하거나 공물을 바치러 가는 운반 책임자, 그밖에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 등이다.


장한철(1744~?)도 출륙금지령의 예외를 인정받은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1770년 가을, 향시에서 장원을 하고 한양으로 과거를 떠났다가 바다에서 표류를 하게 된다. 그가 쓴 책이 「표해록」이다. 「표해록」 시작 부분엔 육지를 보고 싶은 제주인의 소망을 써두고 있다.


그는 “한양이 번화하다는 말만 들었지 유람할 생각은 염두에 두지 못했다. 이제 다행히 시험을 보러 가게 돼 나라의 풍물을 구경하자던 소원이 풀렸다”며 소회를 피력했다.

 

한국 해양문학의 백미

하지만 장한철의 행적은 뚜렷하지 않다. 그가 남긴 「표해록」을 통해 그가 똑똑한 인물임을 유추할 수 있을 뿐, 어디서 죽었는지도 알 길이 없다. 1770년 과거를 보러 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 그는 생을 건진 뒤 다른 일행과 제주로 돌아가지 않고 꿈을 이루기 위해 과거에 도전했다가 낙방하고 귀향한다. 「표해록」의 내용대로라면 그렇다. 4년 뒤에야 그는 꿈을 이룬다. 영조실록 124권에 그의 급제 장면이 소개돼 있다.


묻혀 있던 장한철을 소개한 인물은 고인이 된 정병욱(1922~1982)이다. 서울대 교수를 지낸 고(故) 정병욱은 「표해록」을 한국 문학사에서 찾기 드문 ‘해양문학의 백미’라고 소개하고 있다.


「표해록」은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표류하면서 겪은 과정을 세세하기 기록한 ‘해양지리지’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여기에 하룻밤의 연애 이야기도 담겨 있다.


장한철 일행이 제주를 떠난 때는 영조 46년(1770년) 12월 25일이다. 일행은 모두 29명으로 조난을 당해 류큐(오키나와) 열도의 한 무인도에 도착한다. 4일을 바다에서 버티며 생활한 그들은 다시 5일만에 안남(베트남)의 상선을 만나 구원을 받는다. 이후 전남 청산도 근해에서 다시 조난을 당하며 8명만 살아남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베트남과의 교류 역사 드러나

 

「표해록」 속에는 제주도가 다른 지역과 수많은 교류를 해왔다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제주와 베트남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유추가 가능할 뿐 아니라, 제주의 활동 무대가 넓었음을 읽게 된다. 베트남 상선의 도움으로 배에 오른 장한철 일행은 상선의 규모에 놀란다. 4층으로 구성된 배의 규모가 어머어마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선에 탄 베트남인 80명이 장한철 일행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옛날 탐라왕이 안남 세자를 죽였으므로, (배에 탄 이들이 탐라인임을 알고) 모두 칼로 배를 잘라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장한철 일행은 배에서 내려 작은 배를 타고 또다시 바다에 버려진다. 장한철은 그 와중에 꿈을 꾼다. 그는 ‘비몽사몽간’이라고 표현했다.


“비몽사몽간에 한 미녀가 소복을 입고 나에게 먹을 것을 갖다 준다. 나는 곧 눈을 떠보려 힘썼다.”


이 때 배는 암초에 부딪힌다. 장한철은 헤엄을 치지 못했으나 우연히 섬과 연결된 바위에 오르면서 죽음을 모면한다.


「표해록」은 오딧세이에는 견주지 못하겠지만 10여일 바다 위에서 생사를 넘나든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잘 드러나 있다. 겨우 살아난 그가 발을 디딘 곳은 전남 청산도였다. 거기에서 그는 미녀를 보았다.

 

20대 여인과의 짧고도 긴 만남

 

“나는 처음으로 소복한 여인을 보았다. 마음이 몹시 즐겁다. 마치 낯은 익으나 누군지 기억할 수 없는 사람 같다. 그 연인이 나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니 돌연 깨닫는 바가 있다. 바로 얼마 전, 바다에서 풍파를 만나 까무러쳐 정신을 잃었을 때 나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던 바로 그 여인이다.”


장한철은 그 여인을 잊지 못해 남몰래 하룻밤의 사랑을 나눈다. 조씨라고 밝힌 그 여인은 시집간 이듬해에 남편을 잃고, 홀로 남는다. 애타는 그녀에게 찾아온 건 장한철이었고, 둘은 그렇게 사랑을 나눴다. 그런데 이후 둘의 대화는 늘 그렇듯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좁혀진다.


“내가 만약 너를 데려간다 해도 네가 어머니를 버릴 리가 없을 것이고, 나를 여기 머물게 하여 산다 한들 나에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길테니 이 또한 어쩌나.”


장한철은 이렇게 말한 뒤 과거에 합격해 남도에서 벼슬을 하게 된다면 약속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을 잇는다.


그러자 조씨는 이렇게 응대한다.


“어머니 친척집에 가 있으면서 과거에 합격하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를 버리지 않는다면 좋은 소식이나 전해 주십시오. 저는 꼭 5년 기한으로 기다릴테요. 만약 기한이 지나도 오시지 않으면 그 때는 다른 집안으로 시집가렵니다.”


장한철은 대정현감을 거쳐 강원도의 취곡현령을 지낸다. 그의 이름은 정조실록에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그 때가 정조 11년(1787년)으로, 그의 나이 44세다. 그의 행적이 많지 않으니 청산도에서 정을 나눈 조씨와의 인연이 어떤지도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그는 문학적으로 가치가 풍부한 「표해록」을 우리에게 남겨줬다는 점이다.

<김형훈 미디어제주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