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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 땅이 굳어지듯 아픔 넘어 성장으로

제주한라병원 2020. 3. 31. 16:57



비 온 뒤 땅이 굳어지듯 아픔 넘어 성장으로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Was mich nicht umbringt macht mich stärker). 철학자 니체가 한 말이지요. 날개에 화려한 무늬를 가진 나비가 그냥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알이 애벌레가 되고, 다시 번데기를 거치는 탈바꿈을 거쳐야 비로소 나비가 되는 것이지요. 


성장기 아이들 역시 아픔의 고비를 넘으면서 자라나게 됩니다. 육체의 성장통과 함께 정신적 성숙통을 겪어야 비로소 자라나게 되는 것이지요. 자고 일어나면 한 뼘씩 자라는 아이들의 성장통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더 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듯합니다.


질병, 왕따, 실직, 이혼, 사별, 성폭력, 자연재해와 같이 정신적 또는 신체적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는 상태를 '외상(外傷, trauma)'이라고 합니다. 누가 봐도, 그리고 누가 당해도 힘든 일입니다. 대부분은 부정적 감정(불안, 우울)을 되새기게 되고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도 합니다.


암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에 부여된 직접적인 고통이 한 짐 더 무거운 무게로 다가오기에 더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암 환자의 76%와 환자 보호자의 82.2%가 우울증상을 보이고 있고, 암 환자 보호자의 17.7%는 지난 1년 간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하니 말입니다(국립암센터 국가암관리사업본부, 2011년 전국의 암환자 및 보호자 990쌍을 대상으로 한 불안, 우울 증상 및 자살 충동과 자살 시도에 대한 설문).


하지만 투병이나 간병을 하고 있는 많은 분들이 이러한 외상에 ‘적응’해 나간다는 사실은 참 감사 한 일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적응’을 넘어서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1990년대 말부터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을 비롯한 심리학자들은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96년 테데스키(Tedeschi)와 칼혼(Calhoun)은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라는 개념을 보고하게 됩니다. 이는 외상과 싸워 이겨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긍정적인 변화‘, 즉, 외상을 경험하기 이전에 비해 개인적인 역량과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의 90%가 ‘외상 후 성장’을 보였다고 하니 놀라운 일입니다. 


외상을 경험하면서 ‘적응’을 넘어 ‘성장’에 이른 구체적 변화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들은 이전보다 더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보다 더 깊어졌으며,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짐으로써 내적으로 더욱 강인해지고, 영적으로 풍요로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외상을 겪은 직후에는 -5점이었던 상황이 외상과 싸워나가는 동안 0점을 거쳐 +5점의 상황으로 역전이 된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상 후 성장’에 도달한 사람들은 과연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와 같은 ‘성장’을 경험하게 된 것일까요? 연구에 의하면 외향적, 개방적, 낙관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긍정적인 대처 방식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경우와 그 사람 주변에 지지하고 격려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McCrae & John, 1992; Schaefer & Moos, 1998; Helgeson, Reynolds, & Tomich, 2006).


슈퍼맨을 연기했던 크리스토퍼 리브(Christopher Reeve)는 승마 사고 이후에 사지마비가 되고 맙니다. 그는 외상이라는 높은 벽에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는 외상을 극복하고 그와 같이 척수 손상을 입은 사람을 돕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If you want to go fast, go alone. If you want to far, go together)’는 말이 있습니다. ‘외상 후 성장‘은 외상이라는 고통스러운 상황과 맞서 싸울 때에 열리는 열매입니다. 외상이라는 길이 어둡고 긴 터널로 다가올지언정 그 길 가운데 지친 심신을 쉴 만한 의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외롭기까지 하지는 않을 겁니다. ‘외상 후 성장’이라는 단 열매를 경험한 사람이 그 곁에서 서서 손을 내밀어 준다면 어떨까요? 더 이상 나 혼자서 감내해야하는 외로운 길이 아님을 가슴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반갑지 않은 고통의 순간. 내 힘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라면 상황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장통이 심한 아이들 곁을 지키고 있는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것처럼, 외상이라는 가파른 고개를 오르고 있는 이들을 향한 애정 어린 손길과 시선이 필요하겠습니다. 특히 그들이 가는 길에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지지하고 응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당신도 크리스토퍼 리브가 될 수 있습니다.

 


<진단검사의학과 김동렬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