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8> 김만덕 이야기 두 번째
“영웅은 미담만 쓴다고 대접 받는 건 아니”
사진 : 김만덕기념관에 있는 김만덕 초상.
지난달에 김만덕 이야기를 한차례 했다. 김만덕이 굶주림에 허덕이던 제주도민들을 살리기 위해 구휼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건 구휼에 힘쓴 이는 김만덕만 있던 건 아니었다. 관리들도 쌀을 내놓았고, 그로 인해 품계가 오르기도 했다. 어느 정도의 지위에 있는 관리라면 남을 도울 줄 알아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김만덕 얘기만 한다.
김만덕 이야기는 확대 재생산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 가운데 객주업을 했다는 ‘통설’이다. 통설은 요즘 많이 얘기되는 ‘팩트’와는 다르다. 팩트는 사실이다. 통설은 그렇지 않다. 통설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거나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설”이라고 돼 있다. 설(說)은 팩트라고 말하는 사실과는 다른 개념임을 알아야 한다. 특히 역사라는 학문은 ‘팩트’가 없다면 단순한 이야깃거리가 될 뿐이다.
통설로 전하는 김만덕 객주 얘기를 해보자. 객주는 상인의 물건을 팔아주고 매매도 하는 그런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을 말한다. 숙박도 겸한다. 통설엔 김만덕은 그런 객주업을 하면서 제주에 장사하러 오는 이들의 물건을 팔고, 숙박도 하고, 물론 술도 팔곤 하면서 돈을 모았다고 한다.
문제는 기록이다. 김만덕이 객주업을 했다는 기록이 나오질 않는다. 김만덕이 객주업을 했다는 기록은 20세기에 등장한다. 그것도 1970년대에 등장했다. 당시 김만덕 이야기를 전하던 이들이 ‘객주업’을 집어넣었고, 그게 통설이 된다. 어찌 보면 추론이 사실화 된 양상이다. 당시 김만덕이 객주업을 했다고 전하는 내용도 “주막을 겸한 객주업을 시작한 듯하다”고 돼 있다. 추론이다. 지금은 어떤가. 건입동에 김만덕 객주터도 만들어서 홍보를 한다. “객주업을 시작한 듯하다”로 표현된 이야깃거리가 아예 “객주업을 했다”로 사실처럼 변했다.
객주업을 했다고 하더라도 현재 건입동 일대인지도 불분명하다. 18세기 당시엔 제주도 사람들은 이동을 금지받던 때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마음놓고 육지부를 오갈 수 없는 ‘출륙금지령’을 적용받고 있었다. 제주도 사람들을 오가지 못하게 만든 출륙금지령은 인조 7년(1629)부터 순조 25년(1825)까지 적용됐다. 따라서 이 시기엔 사람들이 오가던 포구도 제한이 따랐다. 주로 쓰던 포구는 화북포와 조천포였다. 김만덕 객주터가 있는 곳은 예전으로 따지면 건입포였는데, 과연 그런 용도로 쓰였는지는 의문이다. 때문에 객주업은 건입포보다는 제주읍성과 가까이에 있던 화북포 인근에 발달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어쨌든 이 문제는 좀 더 연구보완이 필요하다.
객주가 발달하려면 또 다른 조건이 있다. 바로 주변 시장이 활발해야 된다. 제주도는 시장 형성이 매우 늦은 지역 가운데 한곳이다. 19세기 중엽까지도 제주에서는 상인들이 오가는 시장은 갖춰지지 않았다. 1840년(헌종 6) 기록을 보자. 1840년이라면 출륙금지령이 풀린지 15년 뒤의 일이다. 제주목사로 와 있던 이원조가 쓴 <탐라지초본>을 들여다보면 “읍에는 장시가 없고, 재화는 돈을 사용하지 않고 포목만 사용하므로 매매가 매우 어렵다”고 쓰고 있다.
기록으로 보면 제주도는 19세기 중반까지도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 김만덕은 19세기 초에 생을 마감하긴 했으나 18세기를 관통하며 산 인물이다. 그가 열정적으로 활동할 당시는 18세기로, 이원조의 글을 빌린다면 시장 형성이 없던 그런 시대를 살았다. 따라서 객주업을 하며 돈을 벌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물론 제주지역에 상인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규모 시장을 열 정도는 아니었다. 제주와 육지를 오가는 상인들이 있었지만 시장에 내다판 게 아니라, 개인을 상대로 하며 매매를 하는 그런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 김만덕은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그는 기녀 신분이었다. 심노숭은 조선 정조와 순조 때 학자이다. 그는 병적으로 기록에 집착을 했다. 조선시대 학자들이 다 그랬지만 심노숭은 더 심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김만덕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특히 심노숭은 제주에 내려와서 김만덕에 대한 이야기를 남겼다. 이른바 현장 취재인 셈이다. 심노숭은 1795년(정조 19) 제주에서 4개월간 머문다. 그가 표현한 김만덕을 옮겨본다.
“만덕은 품성이 음흉하고 인색해 돈을 보고 따랐다가 돈이 다하면 떠났는데, 그 남자가 입은 바지저고리까지 빼앗았으니, 이렇게 해서 가지고 있는 바지저고리가 수백 벌이 됐다. 매번 늘어놓고 말리니 다른 기녀들조차 침을 뱉고 욕했다. 육지에서 온 상인들이 패가망신하는 이들이 잇따르니, 그는 제주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세상엔 수많은 기록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선택되는 기록이 있고, 그렇지 않은 기록이 있다. 심노숭의 기록은 그런 면에서 선택을 받지 못했다. 김만덕 이야기가 너무 좋게 포장된 상태에서 심노숭의 기록이 대접을 잘 받을 리가 없다. 그래도 심노숭의 기록은 무척 중요하다. 한 인물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좋은 면만 부각시켜서는 안된다. 김만덕은 당대 제주사람을 살린 위대한 인물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릴 건 알려줘야 한다. 그런 면에서 심노숭이 기록한 사실(事實)은 역사적 사실(史實)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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