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종료코너/안대찬세상만사

제우스 이야기, 서구인의 전통적 가치관 반영

제주한라병원 2013. 8. 28. 09:14

- 헤라의 질투와 분노 Ⅲ -
제우스 이야기, 서구인의 전통적 가치관 반영

 

<헤라의 질투와 분노 1편, 2편>에서 우리는 헤라의 분노로 암소로 변해야만 했던 ‘이오’, 곰으로 변해야 했던 ‘칼리스토’, 해가 있는 곳에서는 출산이 허락되지 않았던 ‘레토’의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번 호에선 그 불똥이 애매하게 튀어서 벌어지는 <에코와 나르키소스> 이야기로 이어가본다.


아름다운 요정(님프,nymph)인 에코는 숲과 언덕을 좋아해 틈만 나면 사냥을 즐기거나 숲속에서 놀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에코에게는 안 좋은 버릇이 있었는데,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어느 날 헤라는 남편 제우스가 요정들이랑 시시덕거리고 있지 않을까 싶어 이리저리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에코를 만났는데, 어찌나 정신없이 지껄여대는지 다른 요정들이 그 사이에 다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화가 난 헤라는 에코에게 벌로 ‘말대답’만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때부터 에코는 먼저 말을 꺼낼 수는 없고, 남의 말끝에 대답만 할 수 있게 되었다.하루는 에코가 산에서 사냥감을 뒤쫓는 잘생긴 청년 나르키소스를 보게 된다. 첫눈에 그에게 반했지만 먼저 말을 건넬 수 없었기에 나르키소스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일행을 놓쳐 버린 나르키소스가 큰소리로 동료들을 불렀다. 에코는 나르키소스의 말이 끝나면 끝부분을 되풀이해 대답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나르키소스는 동료들이 대답하는 줄 알고 “나와서 합류하자”고 외쳤다. 이 말에 그녀는 기뻐서 따라 말하며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나르키소스에게 달려들었다.놀란 나르키소스는 에코 곁을 떠나버렸고, 에코는 부끄러워 빨개진 얼굴을 감추느라 깊은 숲 속으로 달아나 숨었다. 이때부터 에코는 동굴이나 절벽에만 살았다. 에코의 몸은 점점 야위어서 살은 모두 없어지고 뼈는 바위가 되었다. 그리고 그 바위에 남은 것은 목소리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우리가 산에서 만나는 메아리(echo)로만 남게 된 것이다.나르키소스는 다른 요정들의 추파도 모두 무시했다. 그의 관심을 끌려다 무안당한 요정들은 신에게 청했다. 나르키소스가 사랑에 눈을 뜨게 하고, 그 사랑에 실연당하는 고통을 느끼게 해달라고.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이 청을 들어 주었다.그 산 속에는 아주 맑은 샘이 있었다. 사냥에 지친 나르키소스는 더위와 갈증에 쫓겨 그 샘으로 왔다.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구부린 순간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는, 샘 안에 사는 아름다운 요정, 수선(水仙)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 모습에 반해 정신없이 내려다보던 나르키소스는 만지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나르키소스가 다가가기만 하면 그 모습은 달아났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안타까움에 애원해 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손만 대면 달아나 버렸다.이렇게 가슴을 태우다 나르키소스는 점차 야위어갔고, 아름다움도 잃어 갔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샘을 떠나지 못하고 애를 태우다 마침내 죽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눈에 띄지 않았고, 대신 그 자리에 한 송이 꽃이 피어났다. 가운데는 자줏빛이고 가장자리는 하얀 수선화였다.


오늘날 자기애에 빠져있는 젊은이들을 ‘나르시스’라고 부르는 것이 여기서 기원한다. 이 이름은 수선화를 가리키는 영어 ‘narcisus’나 독일어 ‘Narzisse’와도 유사하다.


지금까지 제우스의 바람기와 그의 부인 헤라의 질투 이야기를 총 4회에 걸쳐 살펴봤다. 때로는 황금 빗물, 백조, 황소, 구름, 자신의 딸, 인간의 모습 등으로 다양하게 변신해 문란한 사랑을 즐긴 제우스는 실제 그리스인들의 현실을 투영했던 것일까. 그리스신화를 현란하게 장식하고 있는 제우스의 사랑이야기는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이야기는 실제로 존재했다기보다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 세상을 나름대로 설명하기 위해 만든 거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인들이 제우스를 바람둥이로 만든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든 나라의 건국신화는 자기 민족의 시조(始祖)를 하늘에 연관시키려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 신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단군은 천제인 환인의 손자이자 환웅의 아들이다.


고대 서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뿌리를 하늘에 두고 민족의 시조를 하늘과 연관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최고의 신인 제우스와 관련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오랜 세월을 두고 이뤄졌기 때문에 오늘날 이탈리아에 해당되는 로마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서구인들의 시조는 바로 제우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그리스신화에서 제우스와 관련된 다양한 사랑 이야기는 혈통을 중시하는 서구인들의 전통적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