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숨 쉬는 역사책 같은 도시 / 중국 시안
2011년/11월
중국 시안(西安)
살아 숨 쉬는 역사책 같은 도시
▲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이 묻어 있는 화청지
영원한 도시 시안은 수많은 중국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살아있는 역사책 같은 도시이다. 고대에는 ‘창안(장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시안은 황하 강 유역에서 발달한 고대문명의 발상지이기도하다. 3100년 동안 서주(기원전 11세기-기원전 771), 진(기원전 221-기원전 206), 전한(기원전206-24), 그리고 당(618-907) 등 총 13개 왕조, 73명 황제가 1062년 동안 수도로 삼았던 시안은 그리스 아테네와 이집트 카이로 그리고 이탈리아 로마와 함께 세계 4대 문명고도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특히 이곳은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출발지이자 종착지로서 세계의 문화교류와 문명발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도시이다. 전한시대 세계최초로 개척된 실크로드의 발달은 시안을 세계의 중심도시로 성장시켰으며, 동․서양의 모든 사상과 문화가 이곳에 모여 새로운 역사를 빚어냈다.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는 시안을 통해 이탈리아, 페니키아, 페르시아 등으로 흘러갔고, 서양의 금, 코발트, 조로아스터교, 가톨릭교, 이슬람교 등은 이 도시를 통해 일본까지 전해졌다. 이처럼 시안이 세계사에서 갖는 위치와 상징성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인류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진시황제의 탐욕과 권력이 스며 있는 병마용갱. 한 농부가 우물을 파면서 발견한 병마용갱. 병마용갱에서 발견된 청동마차
당나라시대 때 ‘장안(長安)’으로 알려진 시안은 그 당시 인구 100만 명이 넘을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서역에서 들어온 대상인과 선교사, 신라에서 건너간 최치원과 혜초 스님 등 전 세계에서 모여 든 다양한 인종과 문화 그리고 인재가 서로 섞여 독특한 시안만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역사의 보고(寶庫)’의 시안은 땅을 3m 파면 당나라 유물이, 5m를 파면 한나라 유물이, 9m를 파면 진나라 유물이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도시 자체가 거대한 역사박물관을 연상케 한다. 현재 이곳은 국보급 문화유물 41개, 성급문화재 65개, 문화재관광지가 3000개에 달할 만큼 풍부한 유적과 유물이 도시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또한 진시황의 병마용,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아름다운 사랑, 초한지의 무대, 서유기의 현장법사, 중국의 대문호 이백과 백거이, 왕오천축국전의 혜초 스님, 고구려의 후예 고선지 장군 등 다양한 단어가 떠오를 만큼 시안은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자랑한다. 이중에서 진시황의 병마용과 당나라 현종과 세기의 로맨스를 펼쳤던 양귀비의 별장 화청지는 시안을 ‘1男 1女’라는 별칭을 갖게 만들었다. 우선 1男에 해당되는 진시황의 병마용은 한 개인의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이름표가 붙어있지만 진시황 시절 만리장성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그리고 죽음의 결정체로 만들어진 것이다. 세계 8대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진시황의 집념과 열정이 담긴 병마용은 1974년 3월 29일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도용(陶俑)의 머리가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20세기 최고의 고고학적 발견이라는 찬사와 함께 시작된 병마용의 발견은 세계문화인류사에 한 획을 그었다. 마치 지하 군사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병마용 박물관은 흙으로 빚은 실물크기의 병사와 말들이 지하의 3개 기단위에 열을 지어 서서 동쪽에 있는 황제의 묘를 지키고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원래 병사들은 나무천정이 달린 지하의 넓은 방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기원전 206년에 황제의 묘가 도굴 되면서 이곳 역시 노략의 대상이 되었다.
현재 일반인에게 개방되는 병마용은 모두 3개의 갱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보존 상태 좋고 규모가 가장 큰 1호 갱은 6000여점의 도용(陶俑), 도마(陶馬), 전차 40여점 등이 옛날 진나라 시절 100만 대군이 출전을 앞둔 모습이다. 도용의 평균 키는 180cm로 기골이 장대하고 제일 무거운 것은 155kg에 달한다. 도용의 상체 부위는 텅 비어 있고 무게중심을 위해 아래는 흙을 채웠다. 1976년에 발견된 2호 갱은 미국 클린턴 전 미 대통령 가족이 재임 중 직접 안에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이곳의 맨 앞은 궁수 330명이 있는데 그 중 160여명은 무릎을 꿇고 앉아 활을 쏘는 궁수이고 나머지 170여명은 서서 활을 쏘는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3호 갱은 도용 72개, 전차 1대로 발굴된 병마용 중 규모가 가장 작지만 다른 갱들에 비해 깊게 구성돼 지휘본부로 추정되는 곳이다.
시안의 1男 병마용이 웅장하고 위엄 있는 장소라면 1女 화청지는 이와 반대적인 요소들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한 편의 시를 연상케 한다. 시안에서 30km 떨어진 리산 산기슭에 위치한 화청지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세기적인 로맨틱한 사랑이야기 때문에 유명세를 타게 된 황실 온천장이다. 이곳의 역사는 서주(기원전 11세기-기원전711)의 경유가 처음으로 이곳에 궁궐을 지으면서 시작됐다. 그 후로 전한(기원전 206-24)의 초대 황제 고조와 우황제가 차례로 개축을 했다. 뒤를 이어 당나라 현종이 어마어마한 재산을 쏟아 부어 호화판 궁을 새로 지은 후 이름을 ‘화청지 궁’이라고 정하고 41년의 통치기간 동안 이 곳을 36번이나 찾았다. 중국 100대 정원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이곳은 국립 문화유산 보호대상으로 지정되었으며 전국 비경의 하나로도 손꼽히고 있다.
1남의 병마용과 1년의 화청지를 제외하고도 시안에는 당대의 종교 건축물 중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대안탑과 중국 3대 박물관 중에 하나인 산시 역사박물관이 있다. 우선 대안탑은 7세기 중엽, 당나라의 고종황제가 황태자일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자은사(쯔언사) 안에 있다. 탑은 652년 고종황제가 현장법사(쉬안짱)가 인도에서 가져온 650권의 불경을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현장은 이후 이 불경의 일부를 중국어로 번역했다. 처음에는 5층짜리로 지어졌지만 701년과 704년에 5층이 더 올려졌고 왜적의 공격을 받아 3층이 무너졌다. 그 결과 현재는 64m 높이의 7층짜리 탑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네모반듯한 기단 위에 계단식으로 지어진 대안탑의 입구에는 석조 명패가 달려있는데, 여기에는 당 태종과 고종의 명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산시 역사박물관은 고대 문명의 전시장 같은 곳으로 서안 남쪽 교외, 대안탑 북서쪽에 위치해있다. 1991년 일반에게 공개된 이래, 크고 고전적인 건축물과 최신 설비 및 다양한 전시물을 내세우며 중국 최고의 박물관으로 자리 잡았다. 총 면적 65,000평방미터에 당나라 양식을 그대로 살려 만든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는데 정 중앙에 서 있는 본관을 중심으로 다양한 높이의 별관들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검정, 하양, 회색을 주조 색으로 사용한 건물들은 웅장하면서도 간결한 미를 자랑한다. 문화유산을 확실히 보호하기 위해 박물관 내부에는 중앙 냉난방 시스템과 다기능 조명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산시 역사박물관은 총370,000여점의 유물이 시대별, 종류별로 전시되어 있는 대형 박물관이다. 2층짜리 본관건물은 지하까지 포함하여 3개의 주 전시실로 나뉘어져 있다.
명나라 때 증축한 서안 성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