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와 춤을 추는 피아노 선율, 스페인 카디즈
2011년/7월
파도와 춤을 추는 피아노 선율, 스페인 카디즈
▲ 하늘 빛과 바다 빛이 온통 푸른 색으로 물든 카디즈의 바다 풍경.
한낮을 뜨겁게 달구었던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서서히 고개를 숙일 때 햇살은 세상을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인다. 해변 한 귀퉁이에서 카디즈가 낳은 스페인 최고의 국민주의 음악가 파야(Falla Manuel de,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가 그랜드 피아노를 치고, 러시아의 아름다운 발레리나 마신은 노을빛을 가슴 가득 안으며 태양을 향해 힘차게 솟아오른다. 파도는 쉴 새 없이 해변으로 밀려왔다 밀려가고, 파도가 부서진 자리는 또 다른 파도가 달려들어 오늘도 어제처럼 모든 흔적을 없앤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을 머금은 파도는 더욱 거세게 휘몰아치고 또 다른 자신의 자취를 남긴 채 사라진다. 붉게 물든 하늘에 조금씩 어둠이 배이기 시작하면 피아니스트의 열 손가락에서 흐르는 아름다운 선율은 붉은 태양을 더욱 빨갛게 물들이고, 발레리나의 강렬해진 춤사위는 카디즈의 해변을 열정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집시들 사이에서 전해 오는 전설을 바탕으로 파야가 작곡한 발레음악 〈사랑은 마술사〉의 여주인공 칸데라스처럼 발레리나의 춤사위는 간절한 사랑으로 몸부림치는 그녀의 절규에 찬 몸짓이 된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엷은 구름 사이로 뻗어 나오는 여린 광선은 두 사람을 검은 그림자의 실루엣으로 만들어 버린다. 〈광염소나타〉의 백성수처럼 피아니스트의 격정적인 감흥은 절정으로 치닫고, 죽은 남편의 망령을 물리치며 연인 카르멜로와 사랑을 이루려는 발레리나의 몸부림은 너무나 애절하게 느껴진다. 미모의 집시 여인 칸데라스와 아름다운 청년 카르멜로의 사랑이 무르익은 카디즈는 〈사랑은 마술사〉, 〈삼각모자〉, 〈덧없는 인생〉 등의 작품을 만든, 우리에게도 친숙한 파야의 고향이다.
인구 15만의 작은 항구 도시 카디즈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도(州都)인 세비야에서 기차로 2시간 남짓 남서쪽으로 달려가면 도착한다. 스페인 지도에서 찾아보면 이베리아 반도 끝에서 대서양을 향해 작은 반도처럼 돌출해 있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카디즈는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도시가 건설된 후 로마, 서고트,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특히 신대륙을 발견할 당시 수많은 대형 선박들이 항구를 가득 메워 세비야와 함께 선박도시로도 명성을 날렸다. 콜럼버스의 탐험선도 이곳에서 두 번이나 출항했고, 신대륙이 발견된 후에는 아메리카 대륙과의 물류교역 중에서 75퍼센트를 담당하여 부와 명성을 쌓았다. 13 세기 알폰소 10세가 이곳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여 그리스도교의 도시로 재건하자 카디즈 곳곳에서 새로운 활력과 생명력이 넘쳐 났다. 포도주와 광산물을 실어 나르기 위해 선박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제조하는 조선업이 번창하면서 카디즈는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가장 선진적인 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부의 축적은 곧 해적들의 표적이 되었고 그들의 끊임없는 약탈과 침략 때문에 도시민들이 고통을 많이 받기도 하였다. 카디즈는 해군 사령부가 설치되어 있을 만큼 스페인에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로맨틱한 분위기가 흐르는 카디즈의 해안 도로.
도시는 큰 매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천혜의 아름다운 해변이 펼쳐져 있어 여름이면 해수욕을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빈다. 기차역에 내리면 오른쪽으로 과거의 명성을 느낄 수 있는 카디즈 항구가 있고, 건너편으로 구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카디즈 여행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산 후안 데 디오스 광장을 따라 좁고 기다란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그리 크지 않은 카테드랄이 코앞에 바짝 다가서 있다. 세비야나 코르도바를 거쳐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에게는 이 성당이 매우 작아 시시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성당에는 카디즈가 낳은 위대한 음악가 마누엘 파야의 무덤이 있어 파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 또한 성당의 크기는 작지만 카디즈 시민의 정신적 메카이자 삶의 기반이 되는 곳이다.
성당은 1260년에 처음 지어졌고, 1596년에 해적들의 침입으로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무너진 성당을 지키려는 카디즈 시민들의 노력으로 1722년 새롭게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당시 카디즈 시민들은 그라나다 대성당을 짓는 데 일조를 한 비센테 아세로를 모셔 오는 등 아름다운 성당을 짓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8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 내부에는 화려한 장식이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는 없지만 파야의 음악적 향기가 성당 곳곳을 가득 메우고 있다. 현란한 장식보다는 소박한 장식이, 밝음보다는 어둠의 색깔이 파야의 자취를 느끼는 데 훨씬 어울리는 것 같다. 그의 무덤 입구에는 커다란 악보집과 오래된 파이프 오르간이 있어 은은하고 감동적인 파야의 피아노 연주가 금방이라도 성당 안에 울려 퍼질 것 같다.
또한 성당 한 켠에 마련된 전시실을 둘러보면 16세기 신대륙의 발견과 무역항으로서 많은 부를 쌓은 옛 카디즈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성당과 달리 이 성당 안에는 금으로 만든 성잔(聖盞)과 십자가를 비롯해 다양한 금은 세공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카디즈의 옛 명성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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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을 대표하는 음악가, 파야의 무덤이 있는 성당 내부. |
밤에 보아도 푸른 빛을 잃지 않은 카디즈의 밤풍경 |
파야의 예술적 향기를 가슴에 가득 담은 채 발길을 옮겨 성당 뒤로 돌아서는 순간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청량제 같은 시원한 바람이 카디즈의 또 다른 색깔을 보여 준다. 성당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해변은, 좁은 골목길과 작은 성당을 보던 조금은 답답했을 마음을 말끔히 없애 주며 바다의 매력에 빠져 들게 만든다. 쿠바의 말레콘 해안도로처럼 캄포라고 불리는 해안도로를 따라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집들이 들어서 있고 해변과 도로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카디즈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파스텔 톤 건물들은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하모니를 연출한다. 도로 옆으로 1미터 정도의 제방이 있고 그 제방 밑으로 쉴 새 없이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간다.
제방 위에는 삶의 여유와 낭만을 찾기 위해 고기를 낚는 낚시꾼과 따스한 햇볕에 몸을 맡긴 채 독서와 낮잠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사람을 따라온 고양이조차 한가롭게 햇살을 받으며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어 여행자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천천히 산책을 하다 보면 카디즈의 명물 산 세바스티안 성과 모래사장이 일품인 카레타 해변과 만난다. 산 세바스티안 성은 바다 한가운데 세워져 있기 때문에 마치 바다가 갈라진 길을 걷듯이 폭이 2미터 가량 되는 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야 성 입구에 닿는다. 예쁘게 휘어진 가로등이 나란히 놓여 있는 제방 위에는 사랑하는 연인, 산책을 즐기는 사람, 낚시꾼들이 가득 모여 있어 그 동안 숨겨 놓았던 카디즈의 황홀함을 한꺼번에 안겨다 준다.
바다를 향해 걷는 길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바다가 갈라져 갯벌이 속내를 드러낸 우리의 진도와는 사뭇 다른, 산 세바스티안 성으로 이어진 길은 사람 키를 넘는 성난 파도가 휘몰아쳐 이방인의 방문을 경계라도 하듯 사정없이 앞을 가로막는다. 날이 저물수록 숨가쁘게 몰아치는 파도는 제방에 부딪쳐서는 수만 개의 작은 포말이 되어 부서지고, 엷은 햇빛을 받은 포말은 카디즈를 온통 은빛 세계로 물들인다. 몸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센바람이 불어오는 제방에서 금방이라도 삼킬 듯 다가서는 파도를 향해 긴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이 새삼 경이롭게 느껴진다. 제방이나 모래사장에 앉아 파야가 그랬듯이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빠지면 수평선 끝에서 열심히 달려온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며 쏟아 내는 자연의 아름다운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바람의 세기에 따라 저절로 강약을 맞추는 파도 소리는 마치 파야가 흑백 건반을 두드리듯 멋진 선율을 끝없이 선사한다.
얼마나 이곳에 있었을까? 해는 어느새 수평선 너머로 내일을 기약하며 사라지고 대신 창백한 가로등 불빛이 춤을 춘다. 갑자기 하늘에서 카디즈의 아름다움을 시기해 소나기라도 쏟아지기 시작하면 거리는 한순간에 차갑고 쓸쓸하게 변한다. 거리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둥지로 돌아가고, 가로등 밑에서 코트 깃을 세운 연인이 소나기를 맞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보는 순간 카디즈는 파야의 선율과 함께 영원히 가슴에 남는다.
거친 파도와 싸우며 낚시를 즐기고 있는 시민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