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바람에게도 길을 묻는다. 미얀마 바간
2010년/6월
지나가는 바람에게도 길을 묻는다. 미얀마 바간
▲ 저녁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땃빈뉴 사원.
황금빛의 아스라한 옛 영화를 품고 있는 바간은 천탑(千塔)의 도시로 유명하다.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와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유적과 함께 세계 3대 불교 유적지인 바간은 순수한 민족성만큼이나 강한 불심이 수천 여개 불탑마다 알알이 박혀있다. 미얀마의 둘째 도시인 만달레이에서 남서쪽으로 193㎞ 떨어져 있는 바간은 이라와디 강 동쪽 연안에 자리한 천 년 고도(古都)다. 불교의 향기가 자욱하게 스민 이곳은 아나우라타 왕에 의해 건설된 고대 미얀마의 수도로, 중국과 인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우리의 신라와 비슷한 이미지와 역사 가진 바간은 불교를 정치적․통치적 이념으로 삼은 바간 왕조에 의해 11세기 때부터 불탑이 건축되었다. 불교를 믿는 여러 국가들 중에서 수많은 불탑이 있지만 바간의 불탑은 다른 불교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다양한 크기와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전성기 때 무려 6000여 개의 탑과 사원으로 가득했던 바간은 1287년 원나라의 침입으로 2세기 동안 화려했던 불교 시대를 마감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바간 왕조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2500여 개의 불탑은 세월을 정통으로 부딪치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이른 새벽 파고다 꼭대기에 올라서면 발 아래로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바람도 한 점 없는 넓은 평원에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아오른 수 천 여개의 불탑은 마치 서방정토를 연상케 한다. 저마다 애절한 사연을 품고 있는 불탑은 종교적 염원이 없었다면 결코 인간이 만들 수 없었던 감동적인 유산이다. 무슨 이유로 저리도 많은 불탑과 사원을 지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벽돌 하나하나 쌓을 때마다 예술적 영혼을 불어넣은 무명의 장인과 시민들의 불심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래서 ‘미얀마 산책’의 저자인 크리스틴 조디스는 이곳을 “아름다운 풍경에서도 슬픔이 묻어나는 곳”이라고 했다. 정글 사이로 수많은 사원과 탑이 솟아 있는 바간의 아침 풍경은 위대하고 장엄하지만 때로는 장인들의 예술적 고뇌가 서려 있어 슬프게 느껴진다. 이것이 바로 불탑의 도시 바간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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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찬란했던 영화로움이 느껴지는 바간의 석양. |
영원히 파란 하늘 아래로 뾰족한 첨탑을 자랑하는 아난다 사원. |
신심으로 가득한 불자가 아닌 이상 이렇게 많은 불탑과 사원을 둘러본다는 것은 스님의 고행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바간에서 가장 유서 깊고 형태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불탑 몇 개만을 둘러본다. 그 중심에는 쉐지곤. 쉐산도, 틸로민로, 땃빈뉴, 아난다 등이 있다. 우선 불탑 여행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경건한 탑과 사원에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 다녀야 한다. 이슬람의 모스크와 우리나라의 절집은 실내에서만 신발을 벗지만 바간에서는 불탑을 오를 때나 사원마당을 걸을 때나 상관없이 맨발이어야 한다. 날씨가 따뜻해 맨발로 탑을 오를 때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까칠한 벽돌 계단과 솜처럼 푹신한 황톳길의 느낌은 아주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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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간 재래시장에서 간단한 음식을 파는 소녀들의 모습. |
점심 공양을 하기위해 길게 줄을 선 학승들. |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바간의 여행은 지루하지 않다. 그냥 탑 위에 앉아 태양을 벗 삼아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해도 좋고, 아무런 생각 없이 바간의 풍경을 그저 바라만 봐도 좋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게 자신의 인생을 물어봐도 좋고, 여행의 동반자가 있다면 수다를 떨면서 느림의 미학을 몸소 겪어 보는 것도 좋다. 무엇을 하든 바간에서 머무른 동안에는 탑과 사원을 벗어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이것이 조금 익숙해지면 탑과 사원은 단지 불교를 대표하는 유적지가 아닌 바간 시민들의 삶의 터전임을 알게 될 것이다. 좀 더 바간에 대해 깊숙하게 느끼고 싶다면 이름난 탑과 사원을 찾아 잠시 순례자가 되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간 유적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탑은 쉐지곤이다. 이 불탑은 바간 왕조의 설립자인 아나우라타 왕이 타톤을 정복하고 세운 기념물로 바간 유적지에서 보물 1호로 지정된 것이다. ‘황금모래 언덕의 탑’이라는 뜻의 쉐지곤은 말 그대로 황금색의 웅장한 모습이 인상적인 곳으로 ‘미얀마 탑의 어머니’라고 불릴 만큼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의미 있는 곳이다. 그 다음은 바간에서 가장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쉐산도이다. 이 탑 역시 아나우라타 왕이 건축한 것으로 쉐지곤보다 먼저 건축된 것으로 ‘황금빛의 부처님 머리카락’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쉐산도는 바간 탑의 초기에 건축돼 건축미가 뛰어나 쉐지곤을 만드는데 모델이 되기도 했지만 이른 아침과 해질녘에 이곳에 가면 여행자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그리 높지 않은 계단을 따라 탑에 오르면 바간의 가장 아름다운 전경을 볼 수 있다. 특히 안개가 자욱할 때나 붉은 태양이 서산으로 질 때 이곳에 오르면 마치 부처님이 사는 세계에 온 것처럼 신비함과 신성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주로 사진작가나 명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일출 때 이곳을 찾고, 사랑하는 연인들은 일몰 때 이곳을 택한다. 이유가 어떻든 쉐산도에서 보내는 시간은 바간에서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된다. 그 이외에도 1091년에 지어졌으며 ‘부처님의 끝없는 지혜’를 상징하는 아난다 파고다, 바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부 파고다(850년 경), 1218년에 우산을 던져 왕위 계승을 받은 왕이 아버지의 뜻을 감사하기 위해 지은 틸로민로 파고다 등 바간에는 다양한 모습과 재미있는 사연의 탑이 신화와 전설이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굳이 순례자처럼 여기 저기 다니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탑이나 사원에서 머물며 바간이 내 뿜는 고요함과 평정심 그리고 느림을 여행하는 동안이라도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행복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