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적, 발해는 왜 제주를 오갔을까
2012/4
<숨은 제주, 알고 싶은 제주> - 금동허리띠 꾸미개
신라의 적, 발해는 왜 제주를 오갔을까
1992년 제주시 용담동 제사유적 발굴 현장에서 아주 특이한 유물이 발견된다. 폭 3.4㎝, 길이 2.8㎝의 금동허리띠꾸미개다. 당시 현장을 발굴했던 한 학자는 “유적 틈새에서 뭔가 나왔는데 현대 물건으로 알고 버리려했다”고 했을 정도로, 흔히 보이는 유물이 아니었다.
이렇듯 제주시 용담동 제사유적에서 나온 금동허리띠꾸미개는 발굴 순간 버림받을 운명에 처할 정도로 낯선 물건이다. 지금까지 한반도 어디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기에 금동허리띠꾸미개를 놓고선 의문만 쌓여갔다. 그야말로 역사의 미스터리였다.
이후 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유물이 나왔다. 용담동 유적과 비슷한 모양새의 허리띠꾸미개였다. 2001년 일본 가나자와시 우네다히가시(畝田東)의 ‘나베타 유적’에서 발굴된 이 금동허리띠꾸미개는 용담동 제사유적의 것에 비해 다소 작은 크기(1.9㎝×1.8㎝)였다는 점만 다를 뿐 흡사한 모양새를 띠고 있다.
▲ 용담동 제사유적에서 발견된 금동허리띠 꾸미개.
그런데 일본 우네다히가시의 나베타 유적 발굴을 통해 의문의 실체에 대한 한가닥 실마리가 제공됐다. 2001년 당시 요미우리신문(5월 23일자 보도)은 ‘발해로부터?’라는 제목을 통해 이 금동제 허리띠꾸미개를 보도하고 있다. 이 신문은 “중국 동북부의 발해로부터 반입된 가능성이 높고, 발해와의 교류를 증명하는 국내 첫 사례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탐라국이 발해와 직접 교역을 했다는 말인가. 그럴 가능성은 있을까? 용담동 제사유적과 당시 국제상황을 따져보자.
용담동 제사유적은 8~9세기 때 유적이다. 여기서 발굴된 도기와 청동제 숟가락 등이 8~9세기 통일신라 유적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은 용담동 제사유적의 편년을 8~9세기라고 보는 이유다. 특히 용담동 제사유적에서는 고급 그릇인 도기만 버렸다는 점에서 뭔가 특별한 의식을 치른 곳으로 보인다.
왜 고급 그릇을 마구 버렸는가에 대한 의문도 의문이지만 과연 당시 탐라국이 일본이나 여타 나라와 교역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탐라국은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그 위세에 점차 눌리게 된다. 가뜩이나 발해가 건국을 한 시점에 신라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하고, 발해와는 대립각을 세운다. 탐라국이 신라의 세력에 편입되면서 일본과 직접 교역을 하던 탐라국은 8세기 이후 일본과의 공식 국교는 단절된다.
신라와 앙숙관계에 놓였던 발해의 주요 교역 대상국은 당나라와 일본이었다. 발해는 이 두나라와의 교역을 위해 모두 5개의 교통로를 두고 있었다. 이 가운데 해상을 통한 일본과의 루트가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발해는 일본을 거쳐 당나라와의 교역을 이어갔다. 이 중간에 지금의 제주도인 탐라국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통일신라의 세력이 강하던 8세기는 탐라와 일본과의 직접적인 교역은 힘들었겠지만 통일신라 말기에 접어들면 지방호족세력이 득세를 한 것과 맞물려 탐라-일본의 교역의 쉽게 이뤄졌다고 추측이 가능하다. 용담동 제사유적의 금동허리띠꾸미개는 바로 이 시점에 제주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커진다.
허리띠꾸미개는 삼국시대엔 매우 화려하다가 점차 퇴색된다. 특히 당나라의 허리띠꾸미개는 구슬로 표면을 화려하게 꾸미기는 하지만 꽃문양(흔히 인동무늬라고 부름)을 한 예는 없다. 꽃문양을 한 허리띠꾸미개는 당나라 북쪽지방에서 확인이 되며, 요나라의 전신인 거란에서 많이 쓰였다. 발해도 당나라의 복식제도를 도입해 무늬 없는 허리띠꾸미개를 써왔으나 꽃문양을 한 유물이 간혹 발굴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일본 우네다(畝田) 지역의 나베타 유적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나베타 유적은 대규모 건물터가 발견된데다, ‘번(藩)’이라고 쓰인 그릇이 발견됐다. ‘번(藩)’은 외국에서 온 이들에게 쓴 용어로, 이 건물터는 발해 사절과 연관이 있다고 일본 학계는 설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 발견된 금동허리띠꾸미개 역시 발해의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용담동 유적에서 나온 유물이 발해의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일본인 학자인 고지마 요시타카씨(가나자와대 교수)는 자신의 논문을 통해 “나베타 유적에서 나온 허리띠꾸미개는 당나라 양식의 형상에 거란양식의 꽃문양이 새겨졌다. 두 개의 문화가 융합해 만들어졌다”면서 “발해인과 거란인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발해인이 독자적으로 신분표시 장치로 꽃문양을 새긴 허리띠꾸미개를 제작한 것 같다”고 말한다.
▲일본 우네다히가시(畝田東)의 ‘나베타 유적’에서 발굴된 금동허리띠 꾸미개
고지마 교수의 논문을 참고로 한다면 용담동 제사유적에서 나온 허리띠꾸미개는 발해에서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럼 어째서 금동허리띠꾸미개가 제주도에서 발견됐을까. 용담동 유적이 8세기가 아닌 9세기 때 유적이라고 한다면 설명이 가능해진다. 앞서 설명했듯이 8세기는 탐라가 통일신라의 위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할 때였다. 하지만 9세기는 지방호족들이 득세한데다, 해상엔 장보고를 중심으로 활발한 무역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발해인들이 얼마든지 제주도를 기항지로 택했을 수 있다. 그러면서 발해인이 금동허리띠꾸미개를 제주에 남겨놓고 갔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