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매거진/제주의이야기

“탐라인들은 왜 도기를 만들어내지 못했을까”

제주한라병원 2012. 5. 2. 14:39

2012/3

<숨은 제주, 알고 싶은 제주>

 

“탐라인들은 왜 도기를 만들어내지 못했을까”


인류가 채집할 당시부터 곁에 두고 있던 게 있다. 음식물을 보관할 수 있는 그릇이었다. 그 그릇은 재료에 따라, 흙을 굽는 온도 차이에 따라 달리 부른다. 가장 낮은 온도에서 만들어지는 토기로부터, 도기를 거쳐 지금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자기가 등장한다.


이렇듯 토기의 역사는 매우 오래다. 신석기 시대엔 땅바닥에 모닥불을 피우고 그릇을 얹은 다음 그 위에 장작을 덧쌓아 그릇을 구웠다. 청동기 시대엔 불 때는 온도가 올라가지만 도기라기보다는 여전히 토기의 성질을 지닌다.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고내리식 토기.

 

물레를 사용해 만들어진 제주 첫 토기

1985년 당시 일주도로 확장이 이뤄지면서 제주시 고내리 일대에서 다량의 유물이 집중 출토된다. 이후 제주대박물관이 발굴 조사를 벌인 결과 수십개의 구덩이가 발견된다. 이 구덩이는 주거지가 아닌, 생활지내의 유적이었다. 구덩이가 연이어 이어졌다는 점은 토기생산과 관련지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다.


당시 발굴을 통해 세상에 내놓은 토기들은 제주산 적갈색토기로, 고내리 유적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 덕에 ‘고내리식 토기’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고내리식 토기는 종전 곽지리식 토기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탐라전기의 유물인 곽지리식 토기는 점토를 띠로 두르며 쌓아 올렸다면, 고내리식 토기는 물레를 이용했다는 점이 다르다.


고내리식 토기는 5세기부터 탐라후기에 해당하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고내리 일대는 양질의 점토가 깔려 있어 대규모로 토기가 생산됐다는 추측이다.


특히 고내리식 토기는 크기가 이전 토기에 비해 일정하고, 두께도 얇다. 바닥과 몸체를 한 몸이 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몸체와 바닥을 따로 제작했다는 점에서도 토기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계층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고내리식토기는 크기가 일정하게 제작돼 있다.

 

크기 일정하게 만드는 등 전문 생산계층 존재

이는 탐라시대 강력한 지배세력의 등장과 맞물려 신분분화도 제주도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읽게 만든다.


토기는 앞서 말했듯이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다. 또한 가장 흔한 것이었고, 불로 가열해서 만들었기에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게 된다. 때문에 고고학 자료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유물이다.


토기는 그 시대를 구분 짓는 유물이면서 그 지역성을 설명하기에도 그만이다. 아울러 다른 지역과의 비교분석자료로서도 토기의 가치는 매우 크다.


그렇다면 고내리식 토기가 만들어질 당시 동시대 한반도의 모습은 어땠을까. 아쉽게도 탐라와 한반도는 사정이 달랐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 토기보다 수준이 한단계 높아지는 도기를 흔히 만나게 된다. 탐라인들은 보다 수준이 높은 회색도기를 직접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도내 유적에서 발견되는 회색도기는 육지부에서 수입을 한 것들이다.


왜 탐라인들은 도기를 만들어내지 못했을까. 여기엔 흙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무래도 크다. 화산토양이라는 점에서 옛 탐라인들은 도기를 만들지 못하고 수입에 의존했을 것으로 보인다. 화산회토로 굽게 되면 1000℃이상으로 가열했을 때 흙이 녹아내린다고 한다. 도기는 1000℃~1100℃로 구워야 하기에 제주에서는 재료의 특성상 도기를 만들 처지는 아니었던 셈이다.

 

화산토양이어서 도기 생산 불가능

 

고내리식 토기는 한반도의 마지막 무문토기다. 당시 한반도는 미(美)적 감각이 절정에 달하는 등 불교문화가 꽃을 피울 때다. 동시대에 살았던 통일신라인과 탐라인. 생활방식은 달랐으나 탐라인은 나름대로 회색도기의 기술적 우수성을 도입해 고내리식 토기에 입혔다. 그건 제품의 표준화였다. 고내리식 토기는 크기가 균일하다. 전문적인 노동의 결과가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반면 한단계 질 높은 그룻 생산을 하지 못했기에 탐라인들은 어쩔 수 없이 회색도기의 수입이라는 선택을 해야 했다. 회색도기는 일반적인 고내리식 토기와 달리 제사용도 등 별도의 용도로 쓰였다. 그런 점에서 일반화된 고내리식 토기와 회색도기를 쓰는 집단도 달랐을 게다.


수백년간 이어온 그릇 제조방식. 탐라인들이 예전 방식을 고수하는 사이에 다른 나라는 토기에서 도기로 발전을 거듭했다. 여기엔 기술력의 차이도 물론 있지만 토양이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어쨌든 한반도의 마지막 무문토기가 제주도에 있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한반도의 마지막 무문토기는 고내리식 토기다.

 

 

 

고내리식 토기(맨 위)는 동시대와 비교했을 때 기술적 수준이 뒤진다. 당시 통일신라시대는 금동불상 등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