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종료코너/안대찬세상만사

‘응고롱고로’의 교훈

제주한라병원 2012. 2. 3. 13:39

2011년/9월

‘응고롱고로’의 교훈

 

어린아이를 키우는 집에서는 대부분 보았을 법한 애니메이션 중에 ‘라이언킹’이란 영화가 있다. 아프리카 초원을 배경으로 주인공인 어린 사자 ‘심바’가 자라나서 어른이 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과정과 그 속에서 겪는 모험과 사랑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아프리카는 <사자와 그 가족들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이번 호에서는 아프리카 중에서도 사자들이 매우 특별하게 살아가는 한 곳을 소개하려고 한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에는 마사이어로 ‘큰 구멍’이라는 뜻의 ‘응고롱고로’ 분화구(Ngorongoro crater)가 있다. ‘칼데라’라고 불리는 이 지형은 가운데가 푹 팬 유리 재떨이 모양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그 깊이가 600미터가 넘고 지름이 20km에 달하는 고립된 지형이니 거의 아프리카판 ‘노아의 방주’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여기에 사는 사자들은 보이지 않는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한다.


원래 사자는 우두머리 수컷 한 마리에 암컷 몇 마리, 그리고 새끼들이 딸려서 구성되는 ‘프라이드’라는 무리를 이루어 지낸다. 암컷은 어른이 되면 그 프라이드에 머물거나 다른 프라이드로 가기도 한다. 하지만 수컷은 성장하면 무조건 그 프라이드를 떠나 자신이 다른 프라이드의 새로운 우두머리가 돼야 자손을 퍼뜨릴 기회를 얻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피가 유입됨으로써 사자들은 근친번식(inbreeding)의 위험을 피하고 건강한 개체를 번식시키게 된다.


근친번식의 폐해는 잘 알려진 것처럼 열성인자의 결합으로 인한 신체적 기형과 출산율 저하, 면역능력 감소 등으로 훗날 그들이 먹이를 사냥할 힘이 약해짐은 물론, 새끼를 많이 번식시키지도 못함으로써 차츰 그 종(種)의 세력 자체가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외부로부터 지형적으로 심각하게 고립되었던 ‘응고롱고로’의 사자들은 두 번의 커다란 사건을 겪게 된다. 한번은 1962년 대홍수 뒤에 ‘체체파리’라는 흡혈파리가 극성을 부린 일이었다. 체체파리는 집요하게 사자의 피를 빨아댔으며 견디다 못한 사자들은 결국 바싹 말라죽어갔다. 이때 70마리 정도이던 사자의 개체수가 10마리로 줄었다.

그리고 또 다른 사건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발생했는데, 6마리의 숫사자가 전체 무리를 ‘공동지배’하는 기이한 사건이었다. 자연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사례라고 하는데, 현재의 이곳 사자무리들은 모두 이 여섯 마리 숫사자의 자손일 것이다.


이 두 번의 사건을 겪으면서 이들은 심각한 근친번식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 부작용이 우려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은 지금도 자기들만의 영역을 고수하며 외부로부터 다른 사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다. 이것이 ‘응고롱고로’ 사자들이 미래에 큰 불행에 처할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추석을 전후해 한국 정치계를 뒤흔든 ‘안철수 신드롬’은 우리 사회에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그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나 정치적 입장은 논외로 하기로 하자. 제대로 된 정치활동이라 불릴 만한 것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그에게 쏟아진 관심과 지지율은 기성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강한 불신을 시위하듯 보여주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우리 기성 정치권의 모습이 ‘응고롱고로’ 사자들의 불행한 모습을 닮아있기 때문 아닌가 하는 서글픈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우리 정치권에 ‘끼리끼리 문화’, ‘패거리문화’ 등으로 비칠 수 있는 ‘DNA 고립 풍토’가 똬리를 틀어왔고, 이념 또는 가치가 유사한 무리들이 자신의 것과 다른 것을 가진 무리나 다른 계파에 소속된 무리들을 무작정 배제하려는 풍토가 일상화된 현실. 그 속에서 ‘기득권의 따뜻한 꿀물’에 젖어 국민들의 애타는 요구는 도외시한 채 기성 정치권 진입에 대한 벽을 더욱 높이고 공고히 함으로써 새로운 피의 수혈을 막아온 것이 여야를 막론한 현 정치권의 행태는 아니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그런 풍토에서 자연스럽게 이너서클(Inner circle)에 대한 강한 유대감과 유착관계가 생겨나고, 우리끼린데 대충 눈감아주자는 온정주의는 애교가 되며, 긍정적 변화에 대한 국민의 바람은 묵살되는 정치적 병폐의 온상이 키워지는 것은 아닐까.


사회가 긍정적 변화를 주도하는 경쟁력과 리더십 위에 움직이게 되려면 본질적으로는 소프트웨어를 변화시켜야 한다. 정치권이든 학계든, 문화계든 종교계든 이제는 땅따먹기식 계파중심의 폐쇄적 파벌문화를 극복하고 상호존중과 토론, 신뢰의 성숙한 바탕 위에 다양성을 인정하는 ‘열린 DNA 교류’를 시도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항상 신선한 피가 흐를 수 있는 채널을 확보해야만 오늘날 우리가 목도(目睹)하고 있는 ‘이너서클에 의한 닫힌 DNA’의 병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인 물이 썩는 이유는 그 물이 처음부터 더러웠기 때문이 아니라 물길이 막혀서임을 우리 모두 깊이 곱씹어봐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