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종료코너/안대찬세상만사

‘마지막 거인’의 속삭임

제주한라병원 2011. 11. 14. 10:02

2009년 / 3월

 

‘마지막 거인’의 속삭임
-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불황기 성공코드, 막장이거나 감동이거나...”


얼마 전 읽은 한 연예전문 인터넷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불황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워낭소리’라는 다큐멘터리가 극장가에서 100만 관객을 넘기는 대흥행을 거두고 있는 것을 두고 쓴 기사였다. 아직 필자는 보지 못했지만 잔잔하고 여운이 남는,  독특한 감동을 준다는 평이 많은 듯하다.

 

그런데 최근 워낭소리의 주인공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자손들이 세간의 지나친 관심과 오해로 고생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TV프로그램에 인터뷰나 출연을 해달라는 것은 기본이고,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얼마나 불효를 했으면 그 연세까지 그리 힘들게 일을 하시겠냐느니, 사시는 동네를 관광상품화해서 지역명물로 만든다느니... 예전에 ‘집으로’라는 영화가 흥행한 뒤 출연했던 김을분 할머니께서는 한동안 언론의 관심에 시달리시다 결국 원래 살던 마을에 머물지 못하고 다른 곳에 사는 아들집으로 떠나셨던 일도 기억난다.

 

그래서 오늘은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이나 관심이 낳은 슬픈 이야기를 담은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 두껍지도 않으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것 같아서다.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플라스가 쓴 “마지막 거인”이라는 책으로 세계적인 상도 많이 받았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청소년과 어른 모두를 위해 썼다는 이 책의 내용은 ‘허구’일지 모르지만, 그 구성이 너무 리얼해서 마치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과 비슷한 듯 하다.

 

때는 1849년 영국이다. 주인공인 지리학자, 아치볼드 레오폴드 루트모어는 부두에서 만난 한 노인으로부터 신기한 주먹크기의 물건을 사게 된다. 노인은 그것이 여느 고래이빨에 그림을 새겨넣은 하찮은 물건이 아니라 진짜 ‘거인의 이(齒牙)’라며, 곤궁한 형편만 아니라면 결코 팔지 않았을거란 말도 덧붙였다. 집으로 돌아와 자세히 살펴보던 그는 이빨에 그려진 세밀한 그림이 바로 지도이며, 그것은 오래된 책에서 본 적이 있는 ‘거인족의 나라’로 가는 지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원래부터 탐험을 좋아하던 아치볼드는 드디어 ‘거인족의 나라’를 찾아 떠나는 기나긴 원정을 시작하게 된다. 동인도회사의 오래된 무역선을 시작으로 인도와 미얀마를 거쳐, 흑해의 원천에 있다고 추정되는 거인족을 찾기 위한 험난한 여정에 나선 그는 수없이 많은 날을 다양한 고난과 위기를 겪으며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야만족의 습격을 받고서 20여명에 달하던 원정대는 몰살되고, 혼자서만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는 거인국을 향한 외로운 탐사여행을 계속한다.

 

추위와 배고픔을 벗삼아 나아가던 그는 어느날 돌 바닥에 패어있는 기괴한 흔적을 발견한다. 바로 거인의 발자국이었다. 기쁨과 감격 속에도 기진맥진해서 쓰러진 그를 깨운 것은 놀랍게도 감미로운 노래소리와 함께 정성껏 지친 주인공을 치료해주고 있는 문신투성이의 아홉 거인들이었다. 그들의 몸에는 혀와 이를 포함해 온몸에 구불구불하거나 뒤얽히고 복잡한 선들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나무, 식물, 동물, 꽃, 강, 바다 등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그려진 피부위의 악보는 한밤중에 그들이 하늘을 향해 부르던 감미로운 기도의 음악에 대지가 화답하여 부른 진정한 ‘노래’였다. 그들의 피부는 자연을 느끼고, 자신을 표현하는 그들만의 언어,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인간과는 다른 형식으로 소통하며 살아가던 그들과 1년 가까이 친구로 지내던 주인공은 아쉽지만 자신의 세계가 그리워졌다. 거인들도 주인공의 마음을 알고 그를 인간들이 오가는 길목으로 데려다 준다. 이후 여러 경로를 거쳐 2년 7개월간의 모험을 마치고 드디어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그동안 겪었던 신비로운 경험과 거인족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낸다. 과학단체의 거친 반발속에서도 책은 각계의 관심을 받으며 성공을 거두었다. 신문들은 그를 ‘세기의 발견자’라고도 하고 ‘협잡꾼’이라고도 했다.

 

기금이 답지해서 충분한 돈이 마련되자 그는 동료학자 한명과 데생화가 한명을 포함한 두 번째 원정단을 꾸려 미얀마의 마르타방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를 반기는 도시의 저명인사들과 인파들 너머로 그는 예기치 못한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여섯 마리의 송아지가 이끄는 마차에 숭고한 거인, 안탈라의 잘린 머리가 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공포와 고통에 사로잡힌 그의 귓전에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애절하게 속삭이는 듯 했다.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정글을 가로질러 방금 뚫어놓은 듯한 길을 지나 거인족의 나라에 도착해보니 거인친구들의 시체가 작살을 맞은 고래의 몸뚱이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별을 꿈꾸며 아름답게 노래하던 아홉명의 거인들과 명예욕에 눈이 멀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게 되고, 주인공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고기잡이 배의 선원이 되어 평생을 바람과 하늘만을 바라보며 살았다고 한다.

 

정보가 빛의 속도로 전파될 수 있고, 또 이를 사고 파는 것이 일상이 된 현대는 소위 ‘정보화 사회’다. 그러나 이런 정보의 홍수 속에서 원래의 가치있고 아름답던 것들이 파괴되거나 급속하게 변질되는 것을 우리는 종종 겪게 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시장과 경제의 논리속에 무져너 내리는 많은 것의 소중함을 생각하며 오늘 우리 밤하늘의 별을 한 번 바라보자. 그리고 문신투성이 ‘마지막 거인’의 속삭임을 떠올려 보자.

<한국기업데이터 홍보팀장 안 대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