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점상의 죽음과 정조(正祖)
2009년 / 2월
어느 노점상의 죽음과 정조(正祖)
재작년 가을쯤이었다. 12년간 매일 아침이면 붕어빵과 순대, 떡볶이 등을 실은 좌판을 끌고 노점으로 나서 생활해온 48세의 한 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다. 본인은 길 건너편에서 ‘달고나’를 팔고 부인은 ‘붕어빵’을 팔며 밤늦게까지 함께 일하고 나면 수중에 하루 6~7만원이 남는 생활이었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성실히 살아가던 그가 갑자기 목숨을 끊은 것은 불법노점상에 대한 구청의 단속이 있었던 바로 다음 날이었다.
전날 단속에서 그의 부인은 온몸에 멍이 들 정도로 단속 용역업체 직원들과 두 부부는 심하게 몸싸움을 했다고 한다. 이들 부부처럼 노점상을 하는 이들이 단속하는 용역업체 사람들과 심하게 몸싸움을 하게 되는 까닭은 일단 단속을 통해 물품을 빼앗긴 노점상들은 물품을 되찾기 위해서는 수십만원에 달하는 과태료를 내야 하는데다, 되찾기까지 시간도 많이 걸려 생계활동에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몸에 입은 부상과는 별도로 심한 몸싸움으로 시비가 걸려 공무원이나 용역업체 직원들로부터 형사고발이라도 당하게 되면 노점상들은 삼중고(三重苦)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였을까.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 속에서도 소박한 웃음을 잃지 않던 그는 황망히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노점상 문제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닐 뿐더러 어떤 선진국에도 노점은 존재하고 합법적이지 않은 노점과 이를 단속하려는 관청의 숨바꼭질은 끊일 줄을 모른다. 그러나 양극화에 대한 우려가 사회적으로 깊어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문제는 더욱 큰 안타까움을 안겨준다. 당시 지자체 측은 불법 노점상 단속과 그의 자살은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던 반면, 가족들과 노점상 연합회는 정부의 사과와 보상, 그리고 대책을 요구하며 고인의 발인을 거부하기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 용산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민들이 겪은 참사를 지켜보면서 문득 그 때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한 가장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두 사건에서 대응의 방식은 달랐지만 어렵게 살아가던 이들이 극한적인 상황에 몰려서 벌어진 일이란 점에서 그 뿌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 언론에서 이 사건에 대한 시시비비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정치가들의 모양을 보면 양극화 해소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명쾌하게 도출되거나 공유되기는 그리 쉽지 않아보인다. 다만 수 백년전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에서 작은 지혜의 단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년 들어 정조대왕(正祖大王)에 대한 재평가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잘 알려진 것처럼 정조는 노론(老論)의 견제로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뒤 수많은 개혁과 문치를 펼쳐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성군으로 꼽히게 된 인물이다. 그러한 그의 개혁정책 중에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는 조치가 있었는데 참으로 눈여겨 볼만하다.
조선시대에도 인구밀집이 한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성의 시전을 장악하는 자가 바로 조선의 경제계를 주름잡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육의전 등 시전세력은 국가에 세금이나 물품을 납부하는 대가로 영세한 백성들이 난전(難廛, 요즘의 노점상 처지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을 펴는 것을 막고 독점적으로 장사할 권리를 부여받았는데 이것이 소위 금난전권(禁難廛權, 난전을 금할 수 있는 권리)이다.
정조가 왕이 된지 15년째 되던 해에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정조에게 한 사건을 보고하는데 사건의 요지는 한성의 시전에서 이른바 시전깡패들이 육의전(기득권 상인)의 사주를 받아 가난한 백성들이 팔려고 들고 나오는 물건을 사기쳐서 빼앗거나 사람을 패서 내쫓는 등의 나쁜 짓을 하니 성밖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상께서 나서 이들의 애로를 해결해 주십사하는 민원제기였다. 즉 금난전권이라는 권력을 가진 육의전이 가난한 상인들에게 날강도 같은 사기거래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이 사건을 태조(太祖)로부터 내려온 민본주의를 흔드는 것이라 보고 이런 원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라고 지시함으로써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조치를 시행하는데, 신해(辛亥)년에 시행되어 신해통공이라 불렸다. 이 조치는 조선 후기에 자유로운 상업을 촉진하고 영세상인들의 생활경제를 활발하게 함으로써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용산 참사의 문제나 몇 년전 노점상의 자살이나 그 근본적인 문제의 뿌리가 그리 다르지 않다. 원주민 정착률이 10~20%에 불과한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못살고 어려운 사람들이 자본의 논리에 쫓겨 삶의 밑천을 잃고 밀려나는 고통과 상처를 감싸고 어루만질 수 있는 ‘사람 중심’의 행정 철학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제도 보완이 절실한 것이다.
200년도 더 이전에 시행되었던 정책 중에 민본주의(民本主義) 굳건한 신념 아래 사회적 약자를 배려했던 ‘신해통공’과 같은 조치가 있었음을 현대의 행정가와 정치가들이 다시 되새겨볼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 여하를 떠나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서민들이 극한적인 선택에까지 내몰리지는 않는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고 그들을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선진국 진입을 운위하는 한국의 정치권과 행정가들이 꼭, 그리고 그 무엇보다 앞서 이뤄야 할 사명이 아닐까.
<한국기업데이터 홍보팀장 안 대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