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메아나카스의 환영(2)
2011년 / 6월
피메아나카스의 환영(2)
그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은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내가 그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남아 그와 함께 움직이기로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자주 캄보디아를 다녀가곤 했고, 따라서 이곳 사정을 그나마 잘 아는 내가 그를 챙기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행들과 합류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몸살로 침대에만 누워 있던 그가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의 몸 상태를 확인한 뒤, 봐두면 좋을 만한 곳으로 그를 끌고 다녔다. 그리고 그는 말없이 나를 따라다녔다. 몸이 제 상태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를 데려간 곳은 피메아나카스 신전이었다. 원래 이 신전은 소마공주의 궁전이었다. 소마공주는 낮에는 뱀의 모습을 하고, 밤에는 사람의 모습을 했는데, 매일 밤 크메르 왕과 동침을 했다고 한다. 이 시간은 왕비도 첩도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이를 거역하면 왕에게 죽음을 내렸으므로.
"이 이야기는 매우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중국의 주달관이라는 사람이 기록한 내용이라 여러 곳에 잘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소마공주와 관련된 이야기지요."
나는 그에게 소마공주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소마가 살기 시작한 훨씬 이전에, 이 신전에는 뱀의 왕이 살았다. 뱀의 왕은 머리가 아홉 개였다. 그는 달의 여신을 사랑했는데, 그래서 달의 여신에게 사랑을 받아달라고 오래도록 구애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달의 여신이 뱀의 왕을 찾아와 역정을 냈다. 너처럼 머리가 아홉 개나 달린 추한 모습을 하고 어떻게 나를 사랑한다고 하느냐.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뱀의 왕이 대답했다. 그럼, 제가 머리를 하나만 남겨두고 모두 없애면 당신은 나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달의 여신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뱀의 왕은 신전의 계단을 힘겹게 오르며 자신의 머리를 하나씩 하나씩 찢어버렸다. 그리하여 단 하나의 머리만 남게 된 것이다. 여기에 감동받은 달의 여신은 뱀의 왕과 결혼을 했고, 둘 사이에는 아이가 생겼다. 그게 바로 소마공주이다.
그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신전을 올려다보았다. 신전 꼭대기로 이어진 계단은 가파른 경사로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는 신전에 오르려 했다. 내가 아직 열이 있는데 괜찮겠냐고 묻자 그는 괜찮다고 말하고 신전 꼭대기로 향했다. 그는 붉은 정기는 둘째치더라도 이야기 때문에라도 올라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럼 조심히 올라갔다 내려오라고 말했다. 그 동안 먼저 간 사람들과 통화를 할 생각이었다. 그는 염려말라고 말했다.
한 발씩 조심조심 내딛은 끝에 그는 신전의 꼭대기에 올랐다. 앙코르 툼의 주변 광경들이 눈에 들어왔고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씻고 지났다. 그는 조심스럽게 올라온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달의 여신은 자신의 얼굴을 하나씩 자르면서 계단을 올라 자신에게 구애하는 뱀의 왕을 어떤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을까. 자신의 머리를 하나만 남기고 다 자른 뱀의 왕은 확신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일시적인 욕망에 자기를 모두 던져버린 것일까. 그런 후에 다 떨어진 자신의 머리를 보며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후회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결과에 순응하고만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다 순간 아찔해져서 난간 귀퉁이를 재빨리 잡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신전 꼭대기를 향해 계단으로 힘겹게, 피 흘리며 올라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그녀에게 조용히 말했다.
너는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데도 웃고 있어.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향해 힘겹게 올랐던 것일까. 어떤 확신 때문에? 아니면 서로에 대한 순간적인 욕망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이젠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서 모든 것에 순응해버린 건가?
그러는데 문득, 어쩌면 그녀는 그에게 계속 고백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을 그 자체를, 자신의 나약하거나 혹은 거짓되거나 부정적인 모습을 그에게 모두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 다음에 하나씩 잘라내며, 한 걸음, 한 걸음, 숨기거나 그게 당연한 거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가면을 모두 잘라내고, 그렇게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그는 어떻게 했는가.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늘 조바심만 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뱀의 왕의 입장이었다면 순순히 머리를 잘랐을까. 그 고통을 견디며, 단 하나의 머리만 남긴 채 나머지 머리를 모두 잘라냈더라도 달의 여신이 약속을 어길지 모르는데, 그는 과연 그의 머리들을 잘라낼 수 있었을까. 단지 하나의 머리 뒤로 나머지 머리들을 숨기기만 하지는 않았을까. 때로는 확실하지 않은 것을 위해서도 자신이 가진 여덟 개의 머리를 자르고 앞으로 향해야 하는 것이 삶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생각해온 모든 것이 흐려지고, 어디로 흘러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현기증이 일어 신전 꼭대기 석문에 기대어 한참을 앉아 있다가 간신히 아래로 내려왔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많은 것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단을 내려오는 내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이야기를 지난달에 일부러 찾아와 내게 해주었다.
나는 전화기로 넘어오는 그의 이름을 듣고 누구인지 몰라 당황하다 늦게야 알아챘다. 그는 무작정 한 번 만나자고 했다. 적당한 친분을 가진 사람과의 사적인 자리를 피하는 편인 나는 그 만남이 불편해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통사정을 하는 바람에 결국 그날 밤 자리를 갖게 되었다.
사무실 근처에서 만난 그는 이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더니, 이야기 끝에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내게 주었다. 바로 청첩장이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그 분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나는 그의 잔에 술을 채우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아직도 저는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그 일이 저를 찾아올 만한 일인가 싶어서요.”
“만약 그 여행을 하는 동안 저를 혼자 남겨두었더라면, 아니 그곳에 저를 데리고 가지 않으셨더라면, 이런 결말은 맞이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지요? 내가 선택하는 것들이 특정한 미래를 불러오는 거라면, 정말 좋은 선택을 해주셨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나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쨌든 잘 된 일이라는 거지요?”
그러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잘 된 일입니다.”
그가 술잔을 들며 대답했고, 우리는 결혼을 축하하며 그 술을 단숨에 마셔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