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연주와 글쓰기 수업 (1)
2011년 / 2월
피아노 연주와 글쓰기 수업 (1)
나는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어떤 계기였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피아노를 배우던 기억을 되짚을 때마다 떠오르는 몇몇 장면이 있다. 학원버스를 타고 오가며 친구들과 장난치던 장면, 좁은 연습실에서 선생님이 악보 구석에 그려놓은 포도알 혹은 바나나 개수만큼 악보를 반복해 연주하곤 했던 일들. 그러다 피아노 연습이 지루해지면 그 곡을 한 번 연주하고도 두 개의 포도알을 색칠하기도 했다. 연습실 밖에서 듣고 있던 선생님에게 들키면 어김없이 손바닥을 맞았지만.
물론 이렇게 놀거나 농땡이 치던 일만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뒤 악보 읽는 법을 알게 되고, 그 악보에 맞게 건반 누르는 법을 배우다 처음으로 곡 하나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기쁨을 기억한다. 그것은 암호들을 해독하고, 해독한 암호를 소리로 재구성하는 작업처럼 여겨졌다. 또한 교재 하나를 끝내고 더 높은 수준의 교재를 받았을 때의 감동 같은 것들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날, 새로 받은 책으로 터질듯 찬 가방을 흔들며, 집으로 돌아갔었지.
한번은 이런 적도 있다. 아주 더웠던 어느 여름방학, 그날따라 학원에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고, 나는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피아노를 쳤다. 잠시 손을 멈춘 동안, 때마침 고요한 바람이 연습실 안으로 밀려들었고, 그 바람에 커튼이 나풀거렸다. 누군가가 다른 연습실에서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연주를 들으며 나풀거리는 커튼 사이로 창밖의 풍경을 지켜보다, 문득,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연습실에 앉아 피아노를 치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아노를 배우는 시간 동안 이런 기쁨의 순간은 매우 더디게, 그리고 아주 드물게 찾아왔다. 사실 이런 기쁨을 느낀 시간보다는 피아노 수업시간이 빨리 흐르길 원한 때가 더 많았고, 숙제 또한 대충 해치워버렸다.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때문’에 배웠고 또 배워야만 했던 지식들을 머릿속에 담아두기는 했지만, 그 지식들은 융화되어 하나의 음악으로 태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의 내게는 피아노를 쳐야만 할 강렬한 이유가 없었고,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암호를 해독하는 듯한 그 새로움과 기쁨을 점차 잊었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치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었고, 그렇기에 당시의 내게 굳이 음표를 해석하고 그 악보에 맞게 피아노 연습을 하는 일은 번거롭고 힘든 일이었다.
중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나는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었다. 중학생이 되자 내 또래의 많은 친구들이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며 수학이며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을 다녔다. 친구들을 보며 나 자신을 돌아봤다. 악기도 잘 다루고, 그림까지 잘 그리면서, 반 일등은 물론 전체 수석을 놓치지 않는 그런 아이들이 종종 텔레비전에 나왔다. 그 아이들과 나는 거리가 멀었다. 이내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그 돈으로 수학 학원에 등록했다.
그렇다고 피아노 학원에 다녔던 시간들이 내게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피아노를 전혀 배우지 않은 친구들에 비해 음악 수업을 보다 잘 이해했고, 음악 실기시험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는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해 좋은 성적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악보 보는 법을 알았고, 그 악보에 따라 더듬더듬 연주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피아노를 능숙하게 다루거나 잘 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만약 피아노를 배우던 그 시절, 내가 음악의 감동을 알았더라면, 그리고 그 음악을 나 스스로 연주하고 싶다는 열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같은 시간이지만 내 피아노 실력은 조금이나마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나는 요즈음 피아노를 치는 일이 글을 쓰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
나는 몇 년 전부터 학생들을 상대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해왔다. 고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그 연령도 다양하다. 강의를 처음 시작한 이래로 내가 늘 고민하는 것은 아이들이 글쓰기 수업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점이다. 요즈음 글쓰기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글쓰기 수업’의 비중을 점점 높이는 추세이다. 대학의 경우에는 이수해야 할 필수수업으로 지정하기도 한다. 즉, 어느 정도는 강제적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수업에 들어온 학생들 중 큰 기대를 갖고 찾아오는 학생은 많지 않다. 다들 학교에서 정해준 수업이니까 대충 적당한 성적이나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인 듯하다. 간혹 강의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흐트러짐 없이 눈을 반짝이며 수업을 듣는 친구들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다. 이 친구들은 글쓰기 수업 강의실을 나가 다른 그 어떤 수업을 들어도 흐트러짐 없이 눈을 반짝이며 수업을 듣는 부류라는 사실. 원래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충실히 해내는 학생들이라는 말이다.
나는 많은 학생들이 수업시간이 빨리 흐르길 원하고, 숙제 또한 대충 해치워버린다는 것을 알아채곤 한다. 마치 어렸을 때의 내가 피아노를 배우며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할지도 모르겠다. 피아노를 배울 때에는 음표며 코드처럼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기호들을 알아간다는 즐거움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서는 그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음악 언어’처럼 일상적으로 접하기 힘든 것을 새롭고 특별하게 여기는 경향과, ‘일상 언어’와 ‘글쓰기 언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작용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평소 생소하게 여겨지던 것을 학습할 때에는 그 법칙에 충실히 따르려 하고, 그렇게 배우면서 몰랐던 사실을 배웠다는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글쓰기는 어떤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글쓰기를 반복한다. 일기쓰기(물론 지금은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부터 대입 논술까지. 이런 과정에서 글쓰기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글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글쓰기의 필요성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감하지 못한다. 다만 해야만 하는 일일 뿐이다.
이렇게 교과과정의 일환으로 글을 쓰는 것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다. 인터넷 블로그에 글을 남기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장문의 문자를 주고받는다. 글을 쓴다는 인식 없이 글을 쓰고, 글쓰기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못한 채로 글을 쓴다.
이런 습성은 사람들이 ‘피아노 연주’와 ‘글쓰기’를 대하는 자세가 다른 큰 이유가 되기도 한다.
글을 쓸 때 중요한 것은 ‘글’의 감동을 직접 느끼고, 글쓰기 체험을 통해 드러난 자신만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어떤 음악에 감동을 받아 그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기초부터라도 배우겠다는 마음, 영화를 보고 자신도 그처럼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시나리오 작법부터 차근차근 공부하거나,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나서 영향을 받아 자신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무작정 소설의 형태로 적어가보는 시도, 이러한 마음과 시도를 기반으로 내 마음속에 그려놓은 하나의 완성된 목표를 향해 다가가겠다는 각오야말로 무엇인가를 학습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과 시도, 각오 아래에 ‘감동’이 있다. 감동이 곧 내가 배워야 하고 배우고 싶은 필요성이 되며, 이 필요성이 마음과 시도, 각오를 만들어 낸다.
또한 이러한 감동을 토대로 직접 글을 써봐야 한다. 직접 써본 뒤에야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이 수업을 통해 내가 극복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한 편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고, 감동을 받은 뒤 필요성을 느껴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목표가 생긴다.
그 목표에 다다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글을 쓸 때 알아야 할 모든 요소들을 익힌 뒤 글을 쓰는 것, 또다른 하나는 무작정 목표에 맞게 글을 쓴 뒤 실제 목표지점과 내가 쓴 글의 차이를 조금씩 채워나가는 방법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두 번째 방법을 지향한다. 이는 글을 쓸 때 필요한 것들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지쳐 포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글을 써보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또한 글을 쓰기 위한 이론적 토대를 갖춘 뒤에도 전혀 글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한 예로, 고등학교 학생들과 소설쓰기 수업을 한 적이 있는데, 수업 시간에 작법 교재를 통해 인물, 주제, 문체, 구성 등등을 모두 공부한 뒤에 소설을 써보라고 했더니, 학생들이 눈을 말똥말똥 뜬 채로 내게 말했다. 이제 소설 쓰는 법을 알려주세요, 라고. 역시 직접 써보는 게 제일 좋은 글쓰기 연습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
이제 수업이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학생들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내 경험이 부족한 탓도 있고, 학생들의 생각을 짐작한다는 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학생들의 얼굴은 제각각 알 수 없는 기호의 암호 같고, 강의실은 여러 암호들로 이루어진 암호문 같다.
그래서 두렵고, 혼란스럽고, 당황하기도하지만, 그래도……
학생들에게 글쓰기의 감동을 체험할 수 있게 노력하고, 그들이 원하는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시도하고, 그 목표에 다가가도록 이끌거나 이끌리다보면, 그 동안에 그들이 암호를 해독할 힌트 하나씩을 툭툭 던져주지는 않을까? 이런 마음이 그나마 나를 진정시킨다.
어쨌거나 다행스러운 것은, 수업을 하는 일이 예전에 피아노를 배웠던 때와 같거나 혹은 다르다는 점이다. 암호 같은 아이들의 표정을 하나씩 풀어나가며 언젠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처음 보는 음표와 코드를 알게 되었을 때와 같은 희열을 느끼고, 또한 목표 없이 피아노를 치던 때와는 달리 이런 기쁨과 즐거움을 목표로 수업할 수 있다는 것. 요즈음은 이런 마음들이야말로 학생들과 만나는 내내 내게 가장 큰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