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한라병원 2011. 11. 9. 10:41

2010년 / 3월

캐빈3
    
  3.
  우리가 헤어지기 얼마 전, 나는 잠시 외국에 다녀왔다. 나는 공항으로 떠나기 직전 그녀에게 이런 편지를 써 보냈다.
 
  당신은 바쁜지 연락이 없네요. 아니면 휴대전화 벨소리를 줄여놓아서 못 듣는 것일 수도 있지요. 우리가 이야기 할 시간은 이제 없을 거 같군요. 혹 내가 내일 전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아마 당신은 잠들어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깨어 있어도 비몽사몽 상태겠죠. 내 쪽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사람들 소음 속에서 간신히 간다는 말 한마디 하는 게 고작이겠지요. 그래서 편지 씁니다.


  점점 비가 많이 내리려나 봐요. 빗줄기가 거세집니다. 이 비가 그치면 온 세상이 따스해지고, 이제 봄이 오겠지요.


  최근 며칠이 내게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늘 고통 속에 아파하면서 그리던 꿈같은 시간들. 그런 만큼 나는 너무 복잡하고 또 어지럽습니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 걸까요. 행복하면 그걸로 끝이라면 좋을 텐데, 어째서 나는 내 안의 욕망과 욕심 때문에 스스로를 어지럽히는 걸까요.


  어쩌면 나라는 사람을 알게 된 순간부터 당신은 그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계속 떠돌았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너무 무서웠습니다. 나도, 당신도 안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존재라면, 그 부유하는 존재들이 만났을 때에는 어디로 가는 걸까요? 나는, 당신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이 편지를 쓰는 내내 당신 얼굴이 아른거립니다.


  바닥에 떨어진 이 빗물들은 모두 어디로 가나요. 어떤 것들은 바다로 가고, 어떤 것들은 땅 깊숙이 스며들어 자연 속 생명들의 근원이 되고, 또 어떤 것들은 공기 중으로 증발하겠지요. 당신을 향한 마음은 어디로도 빠져나가지 말고 내 안에 고이 머물러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 그대로를 담은 편지였다. 그러나 이런 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계는 나아질 것이 없었다. 모든 일이 마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그녀는 기억 속의 방, 대상은 사라진 채 사랑과 고통이라는 단어만 떠돌고 있는 방에 나를 넣어놓았음이 분명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지금의 혼란 속에서 길을 찾고, 어둠을 밝히고, 사랑과 고통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었던 걸까?


  그 당시에 나는 그것에 대해 아니라고,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하나의 단단한 기둥을 붙잡고 서 있어도 휘청거리는 게 인생이라고 끊임없이 외쳤다. 그것은 일종의 투정이었고, 푸념이었고, 나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으려 한 말이었을 게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내 기억과 경험의 틀 안에서 비롯한 것들이었다. 더 이상 대상을 잃고 싶지 않아서, 대상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해방되고 싶어서, 그리고 대상을 잃은 뒤 찾아올 공허를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그 해 봄, 그러니까 이런 관계를 통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또한 혼란 속에서 길을 찾고, 어둠을 밝히고, 사랑과 무게를 가늠하는 것은 더 불가능하며, 하나의 단단한 기둥을 붙잡고 서 있어도 휘청거리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그에게 돌아갔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한 번도 그녀를 그녀 자체로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내 과거의 기억과 담벼락에 드리워진 어둠을 노려보며 예상했던 것들을 통해 그녀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지난 시간이란 언제나 한 인간에게 또 하나의 렌즈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그것을 아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난 뒤인 것이다.

 

  그녀가 떠나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캐빈에 갔다. 캐빈에 컴퓨터가 들어오고, 그리하여 손님들의 시디가 모두 수납장에 넣어진 이후의 일이다.
  나는 혼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저 옆쪽에는 오랜만에 S가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나는 S의 친구들의 얼굴을 훑어봤다. 그녀는 없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나도 모르게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지경이 되었다. 혹 그녀의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에 그녀는 등장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S와 그녀의 친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는 모양인지 S가 카운터로 가까이 걸어 왔다. 그런데 사장님이 그녀의 이름을 대며 안부를 묻는 것이다. 나는 순간 움찔하며 사장님을 쳐다봤고, 그 순간 사장님은 나와 마주쳤던 시선을 슬며시 돌렸다.


  “그 언니 유학 간다고 했는데, 갔는지도 모르겠네요. 그 뒤로는 연락이 없어요.”


  내가 들은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당연히 이미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녀는 정말 유학을 간 걸까?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와 결혼을 한 걸까? 그러나 이런 것들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또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사랑과 고통의 무게를 미리부터 짐작하고 움직일 필요 없고, 또 그럴 수 없는 것처럼.


  S가 가게를 나간 뒤 다른 손님들도 하나 둘 가게를 떠났다. 덕분에 나는 오래도록 침묵과 함께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처음 찾은 이후 오랜만에 맛보는 캐빈에서의 한산한 시간이었다. 아마 곧 다른 손님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는데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사장님이 시선을 화면에 둔 채로 내게 불쑥 물었다. 
  “왜 봄을 잔인한 계절이라고 하는 걸까요?”


  내가 왜 그런 것 같으냐고 되묻자 사장님이 대답했다.
  “나 자신이 더 초라해져 보이잖아요. 세상은 이렇게 따뜻하고 밝고 아름다운데, 나는 점점 더 초라해지는 것 같으니까.”


  사장은 대답한 후 고개를 돌려 내게 동의를 구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런가요? 라고 대답하고는 말았다. 그 답이야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봄은 내게도 아름답지만 문득문득 세상을 가득 채운 환한 빛과 유난히 붉은 꽃과 그녀와의 대화, 그리고 내가 깨달은 것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면 그 날의 봄만 아련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겪은 봄 이외의 것들- 여름, 가을, 겨울까지 불러일으키고 또한 담벼락에 드리운 그림자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며, 내게 열쇠처럼 남은 음악들, 그리고 그 음악을 듣던 나 자신까지도 불러 일으켜서 굉장히 우울해진다.


  나를, 내 인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다르게 봄을 맞이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리고 다시는 나 자신도 제대로 표현하기 힘든 숨겨진 나 자신에게 영영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 한 구석이 꾹꾹 아려온다.


  컴퓨터 음악검색창에  <The Blower's Daughter>를 써 넣었다. 나는 이 노래를 한동안 듣지 않고 있었다.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동안 잠시 생각했다.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그리고 혹 언젠가 이 노래를 듣고 있는 동안 캐빈 출입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온다면, 그때는 내 기억의 테두리가 아닌 온전한 그녀 자체만을 쳐다볼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