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경제적이며 매력적인 중산간 건축물
[제주의 건축자산을 찾아서] <5> 테시폰
아주 경제적이며 매력적인 중산간 건축물
테시폰은 제주 땅을 지켜온 고(故)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 신부가 남긴 걸작이다. 1928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맥그린치 신부는 1953년 4월 골롬반선교회 활동을 위해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1년 뒤인 1954년 4월에 낯선 제주 땅을 밟는다. 한림성당의 초대 신부로 발을 디디면서 제주와 뗄 수 없는 인연을 시작했다.
맥그린치의 혼 건축물 테시폰은 맥그린치의 혼 그 자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맥그린치의 혼을 담은 테시폰은 독특한 지붕을 지녔다. 지붕은 넘실거린다. 제주바다가 만드는 풍경도 그 지붕과 연결된다. 그러고 보니, 맥그린치 신부가 태어난 아일랜드와 제주의 풍경은 이질적이지 않다. 아일랜드의 대표적 풍광은 제주와 닮아도 너무 닮았다. 맥그린치 신부가 제주에서 60년간 삶을 꾸릴 수 있었던 이유도 두 곳이 닮아서 그러지 않았을까.
물결치는 테시폰의 지붕 곡선은 최고의 매력 포인트다. 일부러 테시폰 지붕을 그렇게 만든 건 아니다. 재료의 한계가 빚어낸 산물이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극한의 경험을 할 때 최상의 것을 얻는다는데, 테시폰도 다르지 않다. 테시폰의 등장은 파격 그 자체였다. 제주 어디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건축물의 등장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1960년대를 풍미한 테시폰은 시멘트가 주재료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제주인 들에게 익숙한 건축물은 단연 초가였다. 초가는 뚝딱 만들 수 없었다. 수개월이 걸리는 고된 작업을 거쳐야 반듯한 내 집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서로 품을 빌려준다. 수눌움이 없으면 안 되는 이유였다. 이처럼 품을 많이 들여야 하는 제주초가는 살아 숨 쉬는 사람처럼 벅찬 관리대상이었다. 테시폰은 그런 제주초가와는 애초에 달랐다.
아름답고 경제적인 테시폰 신부 맥그린치는 ‘사제’로 불리는 종교인이었지만, 제주시 한림 지역의 경제를 일으킨 경영인으로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그가 한림에 와서 처음 상대했던 신자는 젖먹이를 포함해도 25명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그는 ‘배움’을 강조했다. 그가 강조하는 배움은 오로지 행동에서 나왔다. 주변에 있는 이들을 스스로 배우게 했다. 머리에만 담긴 사고가 아닌, 뭔가를 하도록 함으로써 깨우치게 했던 인물이 맥그린치였다. 테시폰도 행동의 결과물로, 사람들은 그걸 통해 배움에 이를 수 있었다.
맥그린치가 제주 땅을 밟은 1950년대, 테시폰을 건축한 1960년대의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세계에서 가장 낙후되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의 땅이 맥그린치가 밟고 있는 땅이었다. 사람들은 그 땅 위에서 자립을 꿈꾸는데, 맥그린치의 경제철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제인 맥그린치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테시폰의 지붕을 만들어내는데, 무척이나 경제적이다. 테시폰은 아치형이다. 아치는 돌을 쌓아서 무너지지 않게 만드는 게 관건인데, 그런 아치를 만들려면 보통 이상의 ‘공력’이 든다. 쉽게 말하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테시폰의 아치는 이와 다르다. 테시폰을 만들기 앞서, 가장 먼저 할 일은 합판을 구해야 한다. 합판을 곡선으로 만들고, 곧게 세우면 목재 형틀이 된다. 곡선의 모양을 한 합판을 몇 개 할 것인가에 따라 집의 길이가 달라진다. 곡선의 합판을 일정 간격으로 세운 뒤, 그 위에 가마니를 얹는다. 가마니는 마르지 않아야 한다. 가마니에 물을 흠뻑 뿌리고, 그 위에 모래와 시멘트를 섞은 반죽을 덧댄다. 물을 묻은 가마니에 시멘트가 붙으면 단단해진다. 서너 번 덧대면 지붕을 비롯한 벽면은 5cm 이상의 단단한 벽체를 얻게 된다. 이쯤에서 생각해보자. 띄엄띄엄 놓인 곡선 형태의 합판 위에 가마니를 얹히고, 그 위에 시멘트를 바르면 어떻게 될까. 더욱이 물을 먹은 가마니는 자연스레 아래로 향하게 마련이다. 테시폰의 아름다운 곡선이 만들어진 비밀은 여기에 있다. 시간은 물론, 돈도 그렇고, 테시폰의 골격을 만드는 일은 며칠이면 마무리된다. 이후엔 내부에 벽체를 구분하는 작업을 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창호를 붙이면 일은 끝난다. 다른 건축물을 만드는 일보다 훨씬 쉽게 집 하나가 완성된다. 그게 곧 맥그린치의 선물이다. 그 선물은 중산간을 일구는 첨병 역할을 할 이들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거듭난다.
2021년 등록문화재 지정 주택으로 쓴 테시폰이 많을 때는 중산간 일대에 70개를 넘겼으나, ‘개척’이라는 단어가 지닌 힘이 사라지면서 테시폰도 함께 힘을 잃었다. 그래도 테시폰을 삶터로 여겼던 이들은, 중산간의 삶을 테시폰과 부대끼며 살기를 바랐다. 흔적은 곳곳에서 보인다. 현대식 형태의 온돌을 깔았던 흔적을 보이는 테시폰도 있고, 1990년대에 주로 쓰던 PVC 계열의 창호가 남아 있는 테시폰도 있다. 테시폰은 끈질기게 중산간을 개척했던 이들의 투쟁일기나 다름없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만 있을 뿐이다. ‘개척’이라는 용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테시폰은 20여 개라고 하며, 이 가운데 제주이시돌목장 일대에 있는 2동은 지난 2021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