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의 도시, 청두(成都)
삼국지의 도시, 청두(成都)
삼국지 주인공 유비·관우·장비가 복사꽃이 핀 화창한 봄날,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의형제의 인연을 맺고, 천하의 주인이 되기 위해 맹세한 도원결의의 땅, ‘청두’
四川省의 중심 청두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촉나라의 수도이자 삼국지의 배경이 되는 유서 깊은 역사의 도시이다. 우리에게는 매운 음식으로 유명한 쓰촨성(四川省)의 중심지로 잘 알려져 있고, 전 세계적으로 아주 귀여운 자이언트 판다의 서식지로도 유명하다. 거기에다 중국에서도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많은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 이유는 청두를 중심으로 양쯔강(揚子江), 민장강(岷江), 퉈장강(沱江), 자링강(嘉陵江) 등 4개의 강이 흐르고 있어 땅이 비옥하고 자원이 풍부해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공업도시이며 교통의 요지 청두 평원의 중심에 있는 청두는 기원전 316년 주나라의 수도로 출발하여 진·한 왕조를 거치며 중국 남서부의 정치·경제·문화 중심지로 발전을 거듭해나갔다. 당시 비단과 방직산업이 크게 발전했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명망 높은 학교가 세워지기도 했다. 삼국시대부터 방직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고, 8세기에는 중국의 산업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금·은·칠기의 세공술이 크게 발달해 1368년에 이르러 쓰촨성의 성도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공예품과 관련된 역사 덕분일까? 청두를 아직도 ‘방직의 도시’라는 의미의 ‘진쳉(錦城)’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또한 성곽을 따라 자라나던 히비스커스 나무 때문에 롱쳉(蓉城) 즉, ‘히비스커스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오늘날의 청두는 상당한 규모의 경·중공업이 발달한 공업도시일 뿐 아니라 주변 여러 도시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현재 청두에는 오래된 건물 대신 고층 빌딩 숲이 들어서 있지만, 2000여 년의 고도답게 오래된 중국 역사와 문화를 보고 느낄 수 있는 두보 초당(杜甫草堂)과 무후사(武侯祠)가 세월을 거슬러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詩聖 두보, 두보 초당 세련된 고층 빌딩 숲 사이로 대나무가 우거지고 나지막한 시냇물 소리가 정겨운 두보 초당으로 들어서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두보의 시 한 수를 굳이 외우지 못하더라도 그가 머물렀던 곳에 서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시성(詩聖)’이라 불릴 정도로 가장 유명한 두보는 759년 겨울, 안녹산과 사사명이 당 현종을 폐위하고 정권 찬탈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자 정치적인 이유로 청두에 잠시 몸을 피하게 되었다. 당시 두보의 친한 친구가 호숫가에 초가집을 짓고 잠시 은거할 수 있게 해 준 곳이 바로 오늘날 두보 초당이다. 두보는 작은 초가집에서 와신상담하며 4년 동안 머물렀다. 이때 지은 시중에서 현재까지 240여 편이 전해지고 있다.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이었음에도 ‘복거(卜居)’, ‘춘야희우(春夜喜雨)’, ‘강촌(江村)’ 등 서정적이고 삶의 여유를 노래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중국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백과 두보다. 이 둘은 ‘안녹산의 난’으로 일생을 방랑 생활로 보내며 시와 술로 울분을 달랬던 시인이다. 다만 두보보다 열한 살이 많았던 이백은 타고난 자유분방함으로 자신의 처지를 매우 낭만적으로 표현했다면 두보는 웅대한 자연을 배경으로 민중과 조국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시로 승화시켰다. 그 결과 “시로 역사를 쓴다.”라는 의미에서 두보를 ‘시사(詩史)’라고도 부르며 그를 존경하고 그의 시를 사랑한다.
시를 통해 당시 사회상을 비판했던 두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바로 두보 초당이다. 현재 두보가 머물렀던 초가는 없고 그 대신 1500년과 1811년, 두 차례 재건축된 초가집의 규모와 구조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건물 곳곳에 두보의 생활과 작품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전시관과 아기자기한 다리와 정자들, 그리고 대나무정원이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천천히 두보의 시를 생각하며 초가와 전시관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을 걷다 보면 그가 여기서 지었던 ‘춘야희우(春夜喜雨)’ 한 소절이 생각난다.
好雨知時節 좋은 비는 시절을 알고 내리나니 當春乃發生 봄이면 초목이 싹트고 자라네 隨風潛入夜 봄비는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 潤物細無聲 가늘게 소리도 없이 만물을 적시네 |
역사를 보여주는 무후사 한 편의 시에 담긴 두보의 내면적 고요함과 서정적 감성에 취했다면 삼국지의 또 다른 주인공, 제갈공명의 위패와 유비의 묘, 혜릉이 모셔진 무후사(武侯祠)에서 또 다른 중국 역사와 마주할 시간이다. 촉나라 최고의 장자방이자 전략가인 제갈공명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도교 사당, 무후사. 이곳의 이름은 제갈공명이 죽은 후의 시호인 ‘충무후(忠侯祠)’에서 유래되었다.
경내로 들어서면 삼국지와 관련된 그림들이 회랑 벽에 순서에 따라 그려져 있고, 그 유명한 제갈공명의 출사표 원문도 벽에 새겨져 있다. 또한 촉나라의 문관과 무관 28명의 동상과 전쟁 때 낮에는 밥을 짓고 밤에는 경보기로 사용했던 ‘제갈고’라 불리는 북이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다. 무후사는 제갈공명의 위패를 기린 곳임에도 불구하고 경내에는 삼국지 주인공들의 도원결의하는 모습이나 유비의 동상을 비롯해 관우와 장비의 동상도 함께 볼 수 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총명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제갈공명의 모습은 맨 끝에 가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다.
그전에는 유비 형제들의 모습과 촉나라 신하의 모습뿐이다. 마지막에 있는 제갈량 전(殿)에 서면 유비․관우․장비가 죽고 나서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출사표를 던진 비장한 그의 모습이 저절로 그려진다. 그의 마음을 아는 것일까? 동상은 아주 촌스럽게 만들어졌지만, 그 앞에는 많은 사람이 커다란 붉은색의 향을 피우며 저마다 제갈공명에게 간절하게 무엇인가를 빈다. 그리고 무후사 뒤편에는 유비의 묘가 있다. 촉나라의 황제이지만 삼국을 통일하지 못한 채 죽어야 했던 유비. 그의 큰 덕은 하늘을 덮을 만큼 크고 깊었다.
이처럼 청두는 중국 대표하는 최고의 시인 두보와 삼국지의 주인공들이 한 시대를 풍미한 곳이다. 그들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이름은 천년이 지난 지금도 청두 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