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매거진/김유정의 제주문화 이야기 '길 가는 그대의 물음'

올레의 화가 김택화 (下)아름다움들을 손이 닿는 데로 마음이 가는 데로

제주한라병원 2023. 11. 1. 14:24

김유정의 길가는 그대의 물음

 

올레의 화가 김택화 ()

아름다움들을 손이 닿는 데로 마음이 가는 데로

 

 

2023년은 김택화 화백이 돌아가신지 17년째가 되는 날이다. 세월의 빠른 흐름에 무상함을 느끼는 시간, 먼저 떠난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그가 제주에 남긴 예술혼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김택화는 처음이 많은 화가이다. 지난 회에 제주 극장 간판을 처음 그리고, 제주의 추상화가로서 처음임을 소개하였는데 이번 회에는 다른 처음을 소개하고자 한다.

 

 

처음으로 그라()픽 디자인전을 열고 한라산 소주 라벨을 디자인하다 김택화는 국전 11회전 특선 이후 낙향하여 제주에서 몇 번의 전시를 가졌다. 19637월 뉴욕 다방에서 개인전을 연 후 이듬해 7월에는 다시 춘홍다방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658, 제주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그라픽 디자인전을 길다방에서 열었다. 서울 생활의 영향으로 상표 디자인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그는 한라산 소주 라벨을 디자인 했는데 그림은 남쪽에서 본 한라산으로 머리에 흰 눈이 쌓인 모습이었다. 흰 눈 때문에 하늘은 더욱 파랗게 보이거니와 더운 여름에는 시원하게 느껴지게 하여 취기가 오를수록 그 술병의 디자인은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사람들은 한라산 술병을 보며 원시적이랄까? 마치 북한 술병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1994년 필자는 세종갤러리 전시 오픈을 마치고김 택화 화백 그리고 지인 4명과 함께 시민회관 동쪽 작은 주막에서 한라산 소주를 마신 적이 있었다.

 

그때 김택화 화백이 한라산 디자인 라벨(label)에 대해 말해주어 나는 그제야 한라산 라벨 디자인이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번은 한라산 소주 회사에서 푸른 색 라벨 대신 연두색 디자인에 금색 글씨로 디자인을 바꾼 적이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1년도 안 돼 다시 김택화 디자인 라벨로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후문(後聞)에 의하면 소주 소비량으로 볼 때 연두색 라벨이 파란색 라벨에 비해 못하다는 것이었다. 파란색이 취할수록 시원한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올레를 처음으로 그리다 변화란 과거를 잃어버리는 것의 시작이고, 정체(停滯)란 미래가 없는 것을 말함이다. 변화나 정체 모두 출발은 현실에서 시작되니 현재를 밟고 선 우리에게 둘 모두 변화이자 멈춤으로써 방식이 다른 것일 뿐이다.

 

올레는 초가 건축의 한 구조이다. 원래는 마소 관리, 바람 막음, 경계 구분, 구조의 '·' 가름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 올레는 새로운 이름으로 제주전역의 길로 거듭났다. 2007년 첫 코스를 개통한 이래 5년 여 만인 2012년 마지막 21코스를 완성했다. 모든 것은 가지를 뻗는다. 변화의 물결을 막을 수 없지만 또 막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새로 만들어지지만 그것도 시간이 가면 자연스럽게 정착되고 사라진다. 결국 시간이 그것을 정리하기 때문이다.

 

김택화는 1965년 제주에 귀향하면서부터 구상으로 방향을 바꾸고 1978년까지 인물이나 정물, 부분적으로 배와 풍경, 절경을 많이 그렸으나 1979년부터는 제주도 전체로 작품의 장소와 소재를 넓혀 나갔다. 그 후 아름다운 제주 풍광에 홀려 제주도 전역을 캔버스에 담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 본의 아니게 최초로 올레를 그린 작품이 되었다. 마을 길, 집 올레, 초가, 오름, 해안, 포구,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모든 절경 지점이 그의 작품 대상이 되었다. 김택화 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작품들 앞에 서면, 보는 사람이 마치 올레길을 걷다 잠시 멈추어 서서 마을 안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도 4, 50년 전 옛 올레길을 말이다.

 

 

김택화와 제주 그리고 시간 폭낭, 돌담, , 사구(沙丘), 해변, 파도, 마을길, 정주석, 초가, 폭설과 잔설, 바다 용암들, 구름과 바람마저 그에게 소중한 제주의 풍경이었고, 그것들은 사계절 시간과 때를 맞춰서 모두 새롭게 태어난다. 풍토의 새로움은 화가의 독창성을 부추긴다. 19846월 동인미술관에서 지난 한 해 동안 그린 작품들을 모아 마련한 열 번째 개인전에서 그는 고백처럼 자신의 심경을 말하고 있다.

 

이곳 고향 산천 속에서 살아온 제가 그동안 무수히 스쳐지나 다니면서도 미처 느껴 볼 수 없었던 그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아름다움들을 손이 닿는 데로 마음이 가는 데로 표현해 보았습니다만 다니면 다닐수록, 그리면 그릴수록 조그마하게만 생각되어지던 섬 덩어리가 이토록 거대하고 무한한 것에 대한 놀라움에 가슴 설렐 뿐입니다.”

 

김택화는 작은 것에서 대우주를 보는 눈을 가진 화가였다. 자연이 회귀하는 것처럼 올레의 화가도 추상화에서 구상화로 돌아왔다가 만년에는 또 다시 구상화가 점점 해체의 길을 가면서 공간이 생략되고 사라지는 감멸기법(減滅技法)을 추구했다. 마치 화면이 지워지면서 실제 공간으로 연결되는 느낌이 되도록 점점 사라지는 작업을 하던 김택화 자신도 스스로 자연으로 돌아갔다. 2006625일의 일이다.

김택화는 1940년 용담에서 출생하여 제주 북국민학교, 오현중학교, 서울 동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 미대 회화과를 중퇴했다. 1962년 홍익대 2학년 때 국전 11회에 국전 특선을 하고 1964년 추상화 그룹 오리진 회화협회창립 맴버로 활동했다. 1965년 제주에 내려와서 구상으로 작업을 바꾸었다. 귀향 후 신성여고 미술교사를 하고 1974년부터 제주대미술교육과에 출강했다. 한국미술협회제주지회장, 제주예총지부장, 제주도립미술관 건립추진준비위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함덕에 김택화 미술관이 있다.

 

포구 캔버스에 유채, 10호 김택화미술관 소장
자구내 포구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초가 캔버스에 유채, 10호, 김택화미술관 소장
마을 포구 캔버스에 유채, 30호, 김ㅋ택화미술관 소장
법환 마을 40호 기당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