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카탈루냐의 진정한 보석, 지로나
활기 넘치는 바르셀로나, 휴양지로 유명한 마요르카섬, 중세 도시 톨레도, 프라도 미술관을 품은 마드리드, 강렬한 태양으로 인상적인 안달루시아의 유서 깊은 도시들……. 이 모든 곳을 품고 있는 스페인은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여행 대국 중 하나이다. 이 중에서도 최근 여행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도시가 하나 있는데, 인구 10만 명의 작은 도시, 지로나(Girona)이다.
지로나는 2,0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카탈루냐의 진정한 보석”으로 일컬어지며 바르셀로나에서 급행열차로 북동쪽 40여 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스페인어로는 ‘헤로나(Gerona)’로 불리지만, 자존심 강한 카탈루냐 사람들은 프랑스 방언에 더 가까운 카탈루냐어 ‘지로나’로 부르길 더 좋아한다. 우리에게 다소 생경한 도시이지만, 몇 년 전부터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2016)’과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2018)’의 촬영지로 조금씩 알려지다, 2019년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바르셀로나의 당일치기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다.
단순히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만 유명했다면 이처럼 인기 있는 여행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풍부한 역사, 잘 보존된 유대인 지구, 구불구불한 중세 거리, 걸을 수 있는 성벽, 많은 녹지 공간, 다채로운 건물, 완벽한 날씨 등 다양한 문화 자산과 천혜의 환경 그리고 아름다운 구시가지 풍경을 지니고 있는 지로나는 카탈루냐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도시 중 하나이다. 무엇보다 ‘테르’, ‘오냐르’, ‘귀엘’, ‘갈리간츠’ 4개의 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지로나는 오래전부터 이베리아인이 거주했고, 기원전 218년에는 로마인들이 이곳에 성채를 지어 도시의 이름을 ‘게룬다(Gerunda)’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5세기 말에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게르만인의 한 갈래인 서고트족이, 715년부터 1,015년까지는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교 무어인이 이곳을 차례로 지배했고, 12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유대인 공동체 도시 중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이력으로 인해 원래의 이베리아 고유성과 다양한 민족의 문화가 융합되어 오늘날 독특한 이미지가 만들어진 도시가 바로 지로나이다.
기차역이 있는 신시가지에서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오냐르강을 건너는 순간, 아득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구시가지가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강을 따라 길게 매달린 집, 구스타브 에펠이 만든 빨간 철교, 가파른 언덕 위에 세워진 대성당, 유대인이 살았던 좁은 거리와 계단, 긴 세월을 간직한 성벽 등 중세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낯선 여행자들을 매혹한다.
구시가지 여행 중에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배경이었던 장소를 하나둘씩 찾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로나 대성당’, ‘아랍 목욕탕’, ‘배심원 광장’, ‘카탈루냐 고고학 박물관’, ‘갈리간츠 다리’, ‘조셉 카르탸나 주교 거리’ 등을 차례대로 만나볼 수 있다.
‘왕좌의 게임’에서 베일러 신전의 외관으로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세계문화유산이자 스페인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의 교회이다. 지로나 시민들의 삶과 역사를 함께 한 대성당은 조그만 교회에서 출발했는데 717년 무어인이 침략했을 때 모스크(이슬람교에서 예배를 하는 건물)로 바뀌었고, 785년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가 이슬람교도를 몰아낸 후 교회로 재건되었다. 그 후 대성당은 이 도시의 절대적인 랜드마크이자, 영혼의 안식처가 되었다. 90개의 가파른 계단, 샤를마뉴 대제의 이름으로 명명된 종탑 그리고 바티칸시티 성 베드로 대성당 다음으로 넓은 홀을 가진 대성당 내부는 특별히 화려하지 않지만 평화롭고 조용하여 더욱 인상적이다.
역사를 응축시킨 보물 같은 대성당을 등지고 계단 모퉁이로 내려오면 ‘왕좌의 게임’에서 아리아 스타크가 그녀를 죽이려고 쫓아오는 웨이프를 피해 은신처로 사용했던 아랍 목욕탕에 이른다. 이름에 ‘아랍’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어 이슬람교도였던 무어인 시대에 건축된 것 같지만, 사실 1194년 아라곤 왕국의 알폰소 1세를 위해 로마와 아랍 목욕탕에서 영감을 받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다.
대성당과 아랍 목욕탕에서 그 자체의 매력을 느꼈다면, 중세시대에 건축된 성벽에서는 아름다운 구 시가지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이 성벽은 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 성벽 중 하나로, 카탈루냐를 장악하려는 무어인을 방어하기 위해 12세기에 지어졌다. 1800년대에 도시 확장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파괴 되버린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최근에 사라진 벽들이 상당 부분 복구되거나 재건되었다. 길이 4.5㎞의 성벽은 대부분의 도시를 둘러싸고 있어 멋진 전망과 더불어 낭만적인 일몰 산책을 누릴 수 있다.
중세 성벽을 산책하며 아름다운 구시가지의 참모습을 감상했다면 미로처럼 얽히고 설킨 구시가지의 거리를 걸어볼 차례이다. 좁은 골목길과 길을 따라 들어서있는 작은 카페들과 함께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구시가지 거리는 일명 ‘엘 콜(El Call)’로 불리는 ‘유대인 거리’이다. 예루살렘을 연상시키는 유대인 거리는 오냐르강 옆에 위치해 있는데 구불구불한 거리를 따라 어깨를 나란히 한 매혹적인 건물들과 어울려 환상적이다. 982년 바르셀로나에서 이주한 25가구의 유대인들은 ‘세파르디 공동체’를 만들고 유대인 예배당 3개를 건축했다. 하지만 11세기에 이르러 가톨릭 신자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며 1492년 스페인이 통일될 때 모두 추방되었다. 다행히도 500여 년 동안 삶을 영위한 유대인들의 집과 건축물들은 변함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대성당, 중세 성벽, 좁은 거리, 영화 촬영지도 충분한 볼거리이지만 지도 없이 그냥 발길 닿는 대로 헤매다 보면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날것 그대로의 지로나를 경험할 수 있고, 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오냐르강에 이르러서는 강을 따라 들어선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인생 사진 포인트로 다가선다. 강에서 바라보는 구시가지 풍경은 아마도 평생 잊히지 않는 명장면으로 추억의 일기장에 기록되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