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현과 5현 그리고 귤림서원
제주 4현과 5현 그리고 귤림서원
제주에서는 4현과 5현이 자주 회자된다. 5현이 짧은 기간 제주에 머문 반면 4현은 제주에 정착하여 후손을 남겼다.
청주한씨 입도조 한천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죄명(不事二君)으로 1392년 제주에 유배되어 가족과 함께 표선면 가시리에 정착했다. 이후 고려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학자였던 한천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동네가 형성되었다. 한천과 후손들이 묻힌 설오름 청주한씨 방묘(防墓)는 방형(네모)석곽묘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제주도기념물(제6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애월읍 과오름 곽남밭 지경(地境)*에는, 김해김씨 좌정승공파 입도조 김만희를 기리는 비문과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고려 조정에서 도첨의 좌정승을 지낸 김만희는 80이 넘은 나이인 1393년 제주에 유배되었다. 송례헌이란 초가를 지어 훈학한 김만희는 11년 만에 해배(解配)되어 황해도로 귀향하였지만, 손자 김예는 남아 가정을 꾸리고 정착하였다.
고려 말 대학자 이제현의 증손 이미는 1401년 벼슬을 거절한 사유로 제주향리로 좌천 유배되었다. 형 이신이 제주 목사겸 도안무사로 자원하면서 동생에게 귀경할 것을 강권했지만 거절하여 혼자 귀경하여야 했다. 경주이씨 익재공파 입도조로 도두동에서 훈학에 힘써 주위의 추앙을 받은 이미는 한라산 지경에 묻혔다 전한다.
신천 강씨 입도조 강영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와 사촌간이다. 2차 왕자의 난 이후 1402년 함덕으로 입도한 강영은 이곳에서 새롭게 가정을 꾸려 훈학에 전념하였다. 도 종친회에 따르면 강영은 연좌제에 의한 역신으로 신분을 속이고 제주에 피신 왔다 한다. 강영은 고려말 최영 장군과 함께 왜구를 물리친 고려의 공신이기도 하다.
제주에서 널리 알려진 5현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인 귤림서원에 모셨던 현인들이다. 사액서원이 되려면 향교의 대성전과 명륜당에 해당하는 사재(祠齋)를 갖추어야 한다. 기묘사화로 제주에 유배되어 사사된 충암 김정(金淨)의 사당을 1578년 조인후 판관이 가락천 동쪽에 세웠고, 그 후 1659년 명도암 김진용의 건의로 이괴 목사가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의 집터에 재실(齋室)인 장수당을 지었다. 충암사당과 장수당이 들어서니 드디어 제주 최초의 서원인 귤림서원이 1682년 개원되었다. 사당에는 충암 김정을 시작으로 송인수 목사와 김상헌 안무어사, 유배 온 동계 정온과 우암 송시열을 모셨는데 이들을 5현이라 칭하였다.
5현이 제주에 머문 기간은 송시열과 송인수 3개월, 김상헌 4개월, 김정 1년 2개월, 정온 8년 6개월이다. 귤림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사라졌으나 폐원된 경내에서 1892년 제주 유생 김희정 등이 오현의 위패로 조두석 5기를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니 오현단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해방 후에는 1946년 오현중학교와 1951년 오현고등학교가 개교했다. 오현단은 1971년 제주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고, 제주시는 2000년대 들어 오현단 경내에 사당․장수당․향현사(鄕賢祠)․협문 등 귤림서원 일부를 복원했다.
도 입도조가 된 제주 4현과 귤림서원에 배향된 제주 5현이 진정 제주 선인을 위한 교학과 문화에 기여한 인물인지는 의문일 수 있다. 당시의 집권세력이나 당파에 의해 현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들 외에도 애민사상을 실천한 인물 또한 우리의 현인이라 할 수 있고, 그들의 삶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연장선에서 최근 비영리 민간단체인 귤림서원이 탄생되기도 했다.
문영택(사)질토래비 이사장, 귤림서원 이사
* 일정한 테두리 안의 땅
** 조선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