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붕어한 ‘임금 광해’를 불러내다
제주에서 붕어한 ‘임금 광해’를 불러내다
<문영택 (사)질토래비 이사장>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이 제주목 서성(西城) 안에서 돌아가신 날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다. 그 후 제주선인들은 이즈음 내리는 비를 광해우(光海雨)라 칭하고, “칠월이라 초하룻날, 대왕 임금 붕어하신 날, 가물당도 비 오람 서라~~” 노래하며 광해의 넋을 달랬다. 제주선인들도 호칭한 대왕 광해를 어째서 역사는 광해군이라 칭하는가? 묘호를 얻지 못하고 종묘에 들지 못해서? 인조반정으로 광해 편인 북인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서?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서?
광해군일기에 실린 폐위 죄목에는 형 임해군과 아우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가둔 폐모살제(廢母殺弟) 외에도 다음의 내용도 들어있다. “~ 선왕 선조는 40년 동안 지성으로 사대하여 평생 등을 서쪽(중국 쪽)으로 대고 앉으신 적이 없도다.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 ”
위의 글에서 보듯 명나라를 지극정성으로 섬긴 선조(14대) 임금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당했다. 특히 명에 사대하고 청을 배척했던 인조(16대) 임금은 즉위 초 이괄의 난(1624)으로 공주까지 피난 가기도 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하여 청과 형제의 맹약을,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가장 치욕적인 군신 관계를 맺어야 했다. 또한 인조는 숙부 인성군과 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를 죽게 하고, 선조의 아들인 인성군의 처자식들과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제주에 유배시켰다. 반면 임진왜란 시 세자로 등극한 광해는 의주로 피난(몽진) 간 아버지 선조를 대신하여 전시의 조정인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쟁터를 누비며, 관민들을 격려하고 명군 지원업무 등을 총괄했다. 1608년 어렵게 왕위에 오른 광해는 불타버린 경복궁을 증·개축 했고, 포도청의 상시설치와 대동법 실시 등으로 민생을 구제하려 노력했다. 허준의 동의보감을 간행했으며, 국교를 재개하여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을 귀국시켰고, 조총과 장검 등을 수입하여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왕권강화를 명목으로 인목대비를 폐위하라는 대북파의 집요한 요청에 광해는, “하늘이여!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다지도 혹독한 형벌을 내린단 말인가. 차라리 인간세상을 벗어나 바닷가에 살며 여생을 마치고 싶구나.”라고 한스러운 넋두리를 하기도 했다. 이 말이 씨가 되었는지 광해는 강화도·태안반도·교동도를 거쳐 1637년 어등포(구좌읍 행원포구)로 입도하여 위리안치 되었고, 1641년 한 서린 삶을 마감했다. 광해가 숨을 거두자, 임금에 대한 예를 표해야 한다는 제주 선인들의 애원을 이시방 목사가 조정에 전달하여, 왕자에 준하는 장례가 관덕정에서 치러졌다.
임금 광해의 흔적은 중앙로 서쪽 길가에 위치한 ‘광해군 적소터’에 표지석으로 남아 있다. 1653년 제주 섬에 표착한 하멜은 표류기에서 생존자 30여 명이 거주했던 곳은 서성 안 임금 숙부(광해)의 적소였다고 적었고,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에도 “(안치소는) 제주목 서성 안에 있다. 정축년(1637년) 6월 6일 어등개에 정박하고 다음 날 제주성에 들어와 위리되어 30명이 윤번으로 지켰다.”라고 쓰여 있다. 이로 본다면 광해 임금의 적소터는 관덕정 서남쪽 근처가 유력해 보인다.
필자는 광해군을 광해임금이라 칭한다. 중국에 사대하던 조선왕조는 무너졌고, 정체성을 바르게 찾아가는 대한민국은 세계로 웅비 중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접근법에서 벗어나, 사실적 가치가 역사의 판단 기준이 되는, 국민이 주인 되는 시대를 맞으려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