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벚나무 자생지는 ‘일본’ 아니라 ‘제주’ 밝혀
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38> 에밀 타케 신부①
1908년 한라산에서 왕벚나무 발견하고 일본 학자도 재확인
서양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인기 있는 구상나무도 찾아내
8월의 이미지는 뭘까. 더위와 휴가, 말복 등의 단어가 쉽게 그려진다. 그래도 잊지 못할 단어가 있다. ‘해방’ 혹은 ‘광복’이다. 일제강점기의 눌린 가슴은 8월 15일 터져 나왔다. 비록 광복이 분단이라는 또 다른 단어와 연결되지만, 그래도 8월은 태극기를 만져보기도 하고, 광복절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기도 한다.
올해도 8월은 다가왔다. 저 멀리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 있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101년만에 우리 땅에 묻혔다. 그러고 보면 ‘해방’이나 ‘광복’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친일’이라는 단어가 사라질 때까지 이런 일은 지속될지도 모른다.
일제를 떠올릴 때면 애꿎게 불려 다니던 나무가 있었다. 바로 왕벚나무다. 그 나무는 언론의 밥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8.15를 비롯해서 일제를 거론할 때마다 ‘친일 잔재’로 떠올리곤 했다. 심지어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기자들은 그 나무를 향해 ‘친일 잔재’라고 쓰곤 했다. 사실 왕벚나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제주도가 본 고향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음에도, 언론의 소재는 잘 변하지 않았다. 그건 무지이기도 했고, ‘친일 타파’를 외치는 특별한 날에만 기사를 올리는 밥벌이기도 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벚나무는 미운털이 수없이 박힌 나무이다. ‘사쿠라’라며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곤 했다. 왕벚나무 자생지가 제주도임에도 말이다. 일본에는 벚나무 자생지가 없음에도, 벚나무는 죄다 일본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지닌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주도가 왕벚나무의 유일한 자생지로 알려진 이후 전남 해남에서도 자생지가 발견되지만, 그럼에도 우린 벚나무를 사기꾼에 빗대 말하는 ‘사쿠라’ 취급을 해왔다.
제주도의 왕벚나무 자생지를 알린 사람은 프랑스인 에밀 타케 신부였다. 타케 신부는 1908년 한라산 해발 600m 지점에서 왕벚나무를 발견했다. 그때 발견한 왕벚나무 표본은 1912년 독일 베를린대학 쾨네 교수에게 보내졌고, 쾨네 교수는 제주도가 왕벚나무 자생지임을 최초로 밝혔다. 1932년엔 일본인 학자 고이즈미 겐이치 박사가 한라산에 올랐다. 고이즈미 박사는 왕벚나무 원산지가 제주도임을 재확인해줬다. 관련 기사는 일본어로 발간되던 <부산일보> 1932년 5월 8일자에 실려 있다.
타케 신부가 발견하고, 일본인 학자도 왕벚나무 원산지를 재확인해줬지만, 우리는 벚나무를 살갑게 대해주지 않았다. 해방 이후 수없이 많은 벚나무가 잘려나갔다. 일본 제국주의가 심어놓은 나무라며 친일을 한 이들보다 더 가혹한 대접을 받았다. 나무가 잘려나간다는 건 죽음이다. 친일행각을 한 이들은 죽지 않고 떳떳하게 살아가는데 나무는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음까지 불사해야 했을까. 언론도 후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언론이 왕벚나무 원산지를 제주도라고 밝힌 건 1962년이 되어서다. 그해 <동아일보> 4월 17일자 4면 톱 기사는 “벚꽃은 우리꽃, 한라산이 원산지”라는 제목을 달았다.
왕벚나무 자생지를 찾아낸 에밀 타케 신부에 대한 이야기는 아는 사람만 안다. 글쓴이도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에밀 타케의 선물>이라는 책을 통해 비로소 그를 알게 됐다. 2019년 발간된 이 책은 정홍규 신부의 작품이다. 정홍규 신부는 환경운동가이면서 생태교육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책을 읽어보면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정홍규 신부의 말소리가 그대로 들린다. 신부가 쓴 책이기에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에밀 타케 신부를 통해 20세기 초반 제주를 이야기하고 있고, 제주의 생태환경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벚나무는 에밀 타케 신부과 뗄 수 없다. 타케 신부는 왕벚나무 외에도 제주에 처음으로 들여온 온주밀감과도 인연이 있으며, 서양에서 트리로 인기가 높은 한라산의 구상나무를 발견한 인물이기도 하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던 타케 신부는 1898년 조선에 발을 딛는다. 대구 남산동에 묻힐 때까지 55년을 대한민국 땅에서 살았다. 제주 생활은 13년이었고, 섬에서의 그는 선교사이면서 식물학자였다. 그가 생을 마감한 대구에서는 교육자 신분으로 31년을 지냈다. 그와 관련된 좀 더 깊은 이야기는 다음 편에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