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매거진/제주의이야기

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35> 사라지는 원도심 건물들

제주한라병원 2021. 5. 25. 15:08

“제주에도 오래된 건축 부재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는 거창하지 않다. 기획은 지나간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어찌 보면 기억의 파편을 맞추는 일이기도 하다. 몇 년 전 취재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2017년 가을이었다. 당시엔 제주시 원도심을 자주 오갔고, 관련 기획물도 쓰고 있던 시절이다. 누군가 내게 전화를 줬다. 내게 전화를 준 인물은 제주시에 관심이 많은 건축가였고, 그가 보기엔 나 역시 원도심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본 모양이다. 그가 전해준 소식은 대산상점이 사라진다는 거였다. 대산상점. 대산(大山)이라는 이름에서 오래된 이미지가 느껴진다. ‘대산’을 일본어로는 ‘오야마’라고 부른다. 그렇다. 대산상점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다. 대산상점은 제주에서 근대적 상권이 가장 이른 시기에 발달한 칠성골에 위치해 있었다. 처음엔 대산상회라고 불렸다. 각종 지물류를 판매하고, 석유와 잡화 등도 이곳을 통해 공급됐다. 그러다 시간이 멈춘다. 멈춤의 시각은 2010년 12월 11일이다. 그 후로 문이 열린 게 기자에게 전화를 온 그 시점 전후이다. 7년간 닫힌 셔터문이 열린 이유는 대산상점의 영업을 재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너무 오랜기간 문을 닫고 있자 행정에서 “보기 흉하다”며 대책을 요구했다. 마침 대산상점을 빌려서 쓰겠다는 이도 나왔다. 지금은 그 상점은사라졌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변한다. 온전하게 모습을그대로 간직하는 일은 드물다. 원도심의 역사를 간직한 대산상점, 그렇게 사라진 기억은 대산상점만은 아니다. 우리 머릿속의 기억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그때 내 손에 들어온 책이 있다. 손에 닿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 책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천자문인데, 초서 천자문이었다. 쓰레기 더미에 묻혀 재로 흩어질 존재였던 그 책은 지금, 내 곁을 지키고 있다. 사람의 손이 닿아서인지 부서질 듯한 그 책은 생명을 얻고 있다. 아무래도 사람의 때가 타면 죽던 것도 살아나는 모양이다. 대산상회. 당시 내부를 수리하면서 기억이 사라졌다. 집은 기억을 가진다. 내부를 수리하게 되면 당연히 예전에 집을 지탱했던 부재들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건축자재가 도입될 수밖에 없다. 건축에서의 리모델링은 기존 부재를 그대로 활용하면서 새로운 걸 입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귀찮다는 이유로, 옛것이라는 이유로 골조만 놔두고 싹 바꾸는 게 더 많다. 기억은 한순간이다. 그렇게 사라진다. 오래된 기억을 억지로 남기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좀 더 관심을 기울인다면 기억을 가진 부재를 살릴 방법은 없을까에 있다. 예전 건축재료는 전부 나무다. 나무는 재활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리모델링을 하면서 뜯겨나간 나무는 사람의 손을거쳐 재탄생하기도 하지만, 매립장으로 가서 불태워진다. 결국은 기억을 지닌 나무라는 부재는 기억을 소멸하고 만다. 우리의 기억과 함께. 대산상점을 비롯, 원도심에 있는 수많은 건물들은 증축하거나 개축을 하며, 혹은 아예 헐리면서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앞으로 그런 건축물도 수없이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재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서울시 종로구는 ‘한옥자재은행’이라는 이색적인 사업을 하고 있다. 종로구가 직접 운영하지는 않고, 전문인들에게 위탁을 줘서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현재 한옥을 전문적으로 수리하고 설계하는 사회적기업에 위탁을 주고 있으며, 사회적기업들이 모여서 협동조합을 꾸려 좀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한옥자재은행은 말 그대로 한옥에 쓰일 부재가 있는 창고이다. 종로구는 북촌한옥마을이 있기에 여느 곳에 비해 한옥 자재를 재활용해야 한다는 욕구가 강했다. 한옥자재은행이 있기 전에는 북촌한옥마을에서 나온 부재가 어떻게 쓰였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옥자재은행이 만들어지면서 한옥을 개보수할 때 쓰였던 부재는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오랜 자재는 변형이 일어나지 않는다. 150년을 넘은 자재들도 한옥자재은행에 쌓여 있다. 종로구는 한옥자재은행에 있는 자재를 활용, 정자를 만들거나 길거리 의자 등으로 쓸 계획도 잡고 있다. 당연히 오랜 부재를 사용하게 되면 이야깃거리가 의자나 정자에 실리게 된다. 제주의 도심에 있는 건축물도 헐릴 운명이라면 한옥자재은행의 형태를 닮은 창고라도 만들었으면 어떨까 싶다. 오래된 부재를 불태워서 사라지게 만들 게 아니라, 오랜 부재를 사용하고 싶은 이들에게 공급을 해주고, 종로구청처럼 부재가 살아서 움직이는 날도 있을테니 말이다.